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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디자인 정치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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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디자인이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이런 재미난 질문을 던진 사람은 영국 그래픽 디자이너 네빌 브로디다. 2001년 10월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서울 타이포잔치: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에 온 그는 오늘날 세계 디자인계의 핵심 문제는 여기에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디자인이 그 자체로 밥이 되거나 정부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릇된 정보를 바로잡고, 각성시키고,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는 것이다. 디자인은 정신을 기르는 음식이라는 그의 주장은 신선했다.

군부독재 시대에 이미 ‘신문의 행간을 읽는’ 뼈아픈 체험을 했던 한국인들로서는 이 지적이 누구보다 빠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신문의 글꼴 선택이나 기사·사진 배치가 왜곡시켰던 여러 사건들의 예는 타이포그래피가 왜 중요한가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그래픽 디자이너들, 특히 글자꼴(타이포그래피)을 다루는 타이포그래퍼들은 글꼴이 지구촌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막강한 힘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터넷처럼 세상을 꿰는 통신수단이 발달할수록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도구인 글꼴이 해야 할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창설의 중심인물이었던 안상수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는 당시 한글을 21세기의 언어로 내보내기 위한 첫 시도로 서울에 멍석을 깔았다. 이름 자체를 ‘타이포 잔치(TypoJanchi)’라 붙인 대목에서도 자부심과 긍지가 느껴진다. 세계에서 가장 젊고 역사가 짧으며 활력 있는 글자로 손꼽히는 한글의 도시 서울에서 이런 잔치를 열었다는 점에 참석자들은 박수를 보냈다. 24개 나라에서 온 100여 명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각 민족의 고유어는 국가 언어지만, 타이포는 세계의 언어’라는 표어를 채택했고, “글꼴이 움직이면 마음이 꿈틀한다”는 북디자이너 정병규씨의 선창에 환호했다.

안상수 교수는 그때 “서울 타이포잔치 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걸까. 한글이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의 공식 문자로 채택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문득 8년 전 글꼴 민주화 운동의 현장이 떠올랐다.

1443년 태어난 한글이 566년 만에 고유어 표기 문자가 없어 소멸할 뻔한 한 민족의 혼을 구한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말살 위기에 처했던 한글이 살아남아 60여 년이 흐른 뒤 이민족에게 원군이 됐다니 격세지감이다.

이번 한글 전파의 주역인 훈민정음학회는 한류(韓流) 열풍 덕을 봤다며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겸손해했다. 이현복 서울대 명예교수는 개인보다는 국가 차원에서 재정을 확보하고 체계적인 지원사업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글꼴로 인쇄된 교과서로 공부한 찌아찌아족이 한국을 가까운 형제처럼 생각한다면 적이 흐뭇한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동안 디자인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 청계천을 복원하고 시청 앞 광장을 조성한 그를 ‘디자인 대통령’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디자인은 하나의 과시적인 업적과 연계돼 명백히 정치적인 문맥을 띠게 된다.

그를 이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디자인에 ‘올인’한 건 그야말로 디자인을 빌미로 한 정치적 위상 높이기의 전형적인 사례로 보인다. 광화문광장에 서보면 ‘디자인 시장’이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더욱이 정책 입안자가 디자인 현장에 나서 지휘하는 모습은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기현상이다. 공공디자인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인 것처럼.

디자인으로 국민정신을 살찌우는 대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디자인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대통령과 시장의 뒤를 좇으려는 추종자들이 ‘벤치마킹’이란 말로 포장한 디자인 베끼기도 성행한다. 가히 ‘디자인 정치시대’다.

그 디자인 정치에 들어가는 엄청난 예산이 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청계천으로, 광화문광장으로 몰려다니는 우리 자신이 미욱해 보인다. 광장이란 말이 무색하게 대화 불통의 닫힌 공간으로 주저앉은 그 무늬만 광장 말이다. 정치적으로 통제하고 조절하기에 맞춤한 그 광장은 획일주의에 물든 사회공간의 그림자를 한국 사회에 드리운다.

10월이면 광화문 광장에 동상으로 자리잡으실 세종대왕을 떠올려본다. 어리석은 백성을 어여삐 여겨 임금이 손수 만든 한글이야말로 얼마나 훌륭한 영혼의 디자인이었는가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정재숙 문화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