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누가 책을 읽게 만드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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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인들이 책을 많이 읽는다고 말하는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고 해야 옳다.

학교는 학생이, 사회는 보통의 시민들이 책을 반려자로 삼게 만든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큰 흐름에서 밀려난다.

어딜 가나 재미있고 유익한 책들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더 자주 서점에 들러 지식 산책을 한다.

일본의 책의 문화는 한국이 수입해서 전혀 손해볼 것이 없는 분야다.

이달초 와세다 (早稻田) 대 부근에서 1주일에 걸쳐 열린 '헌책 축제' 는 책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이 동네에서 문을 열고 있는 50여개의 중고서점들은 축제때 전시 판매할 30여만권의 책을 분류하고 주요 목록을 행사 홍보자료와 함께 몇주일 전부터 뿌리기 시작한다.

축제 당일엔 대학생들부터 허리 구부정한 노인들에게 이르기까지 긴 행렬이 이어진다.

거의 모두가 배낭을 등에 메거나 아니면 손가방을 들었다.

책을 골라 계산을 끝내고 배낭에 집어넣기까지엔 한나절이 걸린다.

긴 전시장을 돌아보느라 허기가 진 사람들이 쭈그리고 앉아 빵을 먹기도 하고 나무에 기대 끔벅 졸기도 한다.

이달말부터 시작되는 독서주간을 맞아 도쿄 (東京) 의 간다 진보초 (神田 神保町)에서 열리는 책의 축제는 더욱 엄청난 규모의 행사다.

이 지역에 있는 음식점과 찻집들까지도 행사 홍보에 나선다.

주요 출판사들은 축제에 소요되는 용지를 무료로 제공한다.

서점과 출판사.요식업계 모두가 '독서 인구' 를 정중하게 대접하는 공동운명체다.

지난 7월 물러난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전 총리는 재임중 주말에 서점을 들르는 일정을 반드시 집어넣었다.

현재의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총리는 아직 서점 방문할 시간조차 없으나 주요 신간 서적은 꼬박 읽는다고 밝혀 문화인으로 체면을 세웠다.

올해 64세인 미치코 일본 왕비는 최근 열린 국제아동도서평의회에서 독서에

대해 강연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이 참석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어린 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책을 찾아 읽는 즐거움을 회상한 왕비의 독서 강연을 들려달라는 시청자들의 요청에 못이겨 일부 방송사들이 공개 방송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정치.경제.사회 각계 리더들은 일본의 독서운동에 큰 동기를 부여한다.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독서 캠페인은 특히 봄철 어린이 날을 중심으로 한 어린이 독서주간 (14일간) 과 가을철 문화의 날을 전후로 한 독서주간 (14일간)에 피크에 이른다.

이런 행사들은 패전후 '문화국가 건설' 을 위해 부활된 것이다.

매일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전 10분정도의 독서시간을 갖도록 하는 중.고등학교가 5백여개교나 된다.

학생들이 책을 읽는 재미를 느끼도록 지도하는 것이 학교교육의 책임이라는 입장이다.

수험지옥이 가져온 언어능력 상실에 대한 위기감에서 출발했다.

서점들은 시민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판매장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전국에 52개의 대형 서점과 27개의 해외점포도 운영하고 있는 기노쿠니야 (紀伊國屋) 서점의 경우 '책은 배우, 서점은 무대, 사원은 연출가' 라는 신념으로 독자를 확대해 왔다.

서점안에 홀도 만들고 갤러리를 설치한 곳도 많다.

산세이도 (三省堂) 서점도 전국 점포망을 넓혀가고 있다.

중고서적을 다루는 북오프가 주요 도시 교외에서 운영하고 있는 점포는 무려 2백50여개, 헌책을 사들이고 되판다.

'책과의 만남' 을 주선하는 곳은 학교이며 서점이고 사회다.

그리고 또 하나 빼서는 안될 곳이 도서관이다.

일본 각급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가는 등록자수만 해도 3천1백만명을 넘어섰다.

책 대출도 지난 10년간 70%나 늘었다.

영국에 비하면 공공도서관 시설이 아직도 모자라 이러고도 경제대국이냐는 비난여론이 끊이지 않는다.

어린이 문고와 이동도서관 확대는 거의 주민운동으로 추진되고 있다.

주민들은 예외없이 도서관 협의회를 설치하고 지자체들은 매년 도서관 백서를 발행해 평가를 받고 있다.

올들어 전후 최대의 불경기는 책의 문화에까지 주름살을 안겨주고 있으나 우량독자층은 요지부동이다.

일본에서 책을 만들고 팔고 대출하는 장소가 이제는 종합적 생활문화 공간으로 크게 성장해가고 있다.

한국의 곳곳을 책 냄새가 나는 공간으로 바꾸어 가기 위해서는 일본의 책의 문화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각종 미디어를 활용한 정보자원의 제공을 위해서도 더욱 그러하다.

최철주(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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