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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덕분에 자유 찾은 프랑스 온 사회에 ‘미국 신드롬’ 번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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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44년 6월 6일의 노르망디 상륙에서 8월 25일의 파리 해방을 거치는 동안 프랑스인의 미국인에 대한 호감지수는 급격히 치솟았다. 사람들은 미군을 해방자로 열렬히 환영했다. 미군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지프를 타고 다니며 거리의 시민과 아이들에게 담배와 껌을 나눠주었다(사진). 전쟁 기간 동안 가난과 결핍에 시달리던 프랑스 어린이들은 미군의 부유함과 후한 인심에 놀랐다. 그들은 매사에 여유만만하고 자신감에 찬 것처럼 보였다.

물론 모든 프랑스인이 미군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을 인정하길 꺼리는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농민들이 러시아 평원에서 독일군을 격파함으로써 승리의 사전작업을 수행했고, 미군은 지리멸렬해진 독일군을 맞아 싸운 것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리를 해방시킨 것이 미군 제2기갑사단이었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쇼크’가 프랑스에 넘쳤다. 1946년 5월 28일 미 국무장관 제임스 프랜시스 번스와 프랑스 총리 겸 외무장관 레옹 블룸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다. ‘블룸-번스 협정’은 미국 영화 수입에 대한 모든 종류의 제한을 철폐했다. 그해 6월 22일 레옹 블룸은 ‘미국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협정을 받아들여야 했음을 실토했다. 그 결과 프랑스의 스크린을 미국 영화들이 온통 점령하게 되었다. 1947년 상반기에 영화관들은 미국 영화를 337편 상영했지만 프랑스 영화는 54편 상영하는 데 그쳤다. 배우 겸 연출가 루이 주베(1887~1951)가 이런 상황에 대한 저항운동의 선두에 섰다. 좌파가 그를 지지했다. 다행히 미국과의 협정은 이듬해 개정되었다.

언론은 미국식 생활방식을 다룬 수많은 기사를 실었다. 1954년 ‘마리 클레르’ 복간호 독자란에는 미군과 결혼한 프랑스 여성들의 편지가 실렸다. 여러 해 전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던 그들은 단독주택의 안락함, 자가용 자동차, 사교 모임 등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결과 ‘미국의 물질주의’에 대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여성 독자들은 대서양 건너에 지상낙원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품게 되었다. TV에 비친 미국인들은 어려운 문제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성공의 화신들처럼 보였다. 일부 프랑스 부모들은 TV에서 방영되는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자녀들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도 비슷한 환상이 자라나고 있었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