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近交遠攻의 시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진 (秦) 나라의 천하통일은 시황제 (始皇帝) 의 손으로 BC 221년 완성됐지만 그 방향을 잡은 것은 소양왕 (昭襄王.306~251 BC) 이었다.

소양왕은 범수 (范) 의 원교근공책 (遠交近攻策) 을 채택해 이웃나라들을 집중적으로 공격,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기존의 세력균형을 깨뜨렸다.

이전의 근교원공책 (近交遠攻策) 은 춘추시대 이래의 세력균형에 입각한 공존정책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웃나라 사이에는 시빗거리가 많다.

그렇다고 이웃과의 분쟁에만 골몰해 국력을 고갈시켰다가는 언제, 어디서 제3의 적이 나타나 뒤통수를 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많은 나라가 병존하던 춘추 (春秋) 시대에는 인접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가지는 것이 생존전략의 기본이었다.

경쟁하는나라가 열 개 안쪽으로 줄어든 전국 (戰國) 시대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상품시장에서도 공급자의 수가 적으면서 담합이 이뤄지지 않을 때 덤핑 등 극한경쟁의 양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한 나라의 성쇠가 타국의 명운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상황에서 평화공존이란 있을 수 없고,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극한투쟁이 인접국간의 사활을 건 전쟁으로 나타난다.

진나라의진격 앞에 다른 나라들은 소진 (蘇秦) 의 합종책 (合縱策) 으로 뭉쳐 대항하려 했다.

상품시장에 비유하자면 무한경쟁이 파멸을 불러올 것을 깨달은 공급자들이 담합을 통해 현상유지를 꾀한 것과 같다.

이 담합을 진나라는 원교근공책으로 깨뜨렸다.

가장 멀리 있어 진나라의 위협을 제일 적게 받는 제 (齊) 나라를 유혹해 연횡 (連衡) 으로 합종을 차단한 것이다.

1990년대 세계 경제전쟁의 양상은 전국 말기를 연상시킨다.

세계무역기구 (WTO) 를 앞세워 각국의 보호장벽을 무너뜨린 미국자본의 진격은 천하통일에 나선 진나라 군대와 방불하다.

최근의 미국경기 후퇴는 진나라의 진격이 합종책에 부딪쳐 주춤했던 것처럼 볼 수도 있겠다.

일본은 달러화의 진격에 맞설 합종의 필요성을 느낀 것일까. 아시아통화권 구축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일본은 전에 없이 간곡한 눈빛을 이웃들에게 보내고 있다.

우리에게도 국제관계를 점검해 볼 좋은 기회다.

건국 이래 모든 인접국과 적대적 내지 불편한 관계를 가진 채 멀리 있는 '우방' 만 쳐다보고 지낸 것이 잘한 일일까.

'한.일관계의 새 시대' 의 의미는 한.일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