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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만에 남북 적십자회담 무대 떠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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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2~3년이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33년을 흘려 보내고도 이산가족 문제를 풀지 못한 채 떠나게 됐습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특보를 끝으로 지난달 31일 남북 적십자회담 현장을 떠난 이병웅(63)씨는 이런 말로 아쉬움을 대신했다. 30세 때인 1971년 8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 간 첫 파견원 접촉 때 수행원으로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적십자회담 수석대표까지 지낸 그는 '남북 적십자 관계의 산 증인'으로 통한다.

이 전 특보는 "지난해 11월 남북이 합의한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가 아직 착공조차 못하고 있는 게 제일 아쉽다"며 "이산가족과 납북자.국군포로의 한을 풀려고 열심히 뛰었지만 더 잘했으면 하는 후회도 있다"고 말했다.

이 전 특보는 늘 웃는 얼굴로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하지만 남북회담장에서는 원칙주의자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98년 3월 베이징(北京) 적십자 대표접촉 때 옥수수 지원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북측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자 그는 "인민들이 굶어죽는데 그런 허튼소리나 하려면 돌아가라"고 으름장을 놓아 북측 요구를 일축했다.

그는 지난해 사망한 박영수 전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을 가장 기억에 남는 북측 인물로 꼽았다.

85년부터 적십자회담의 대표로 함께 일했고, 92년 판문점 회담 때는 수석대표로 만났기 때문이다.'서울 불바다'발언을 계기로 강성 인물로 인식된 박영수는 한 회담장에서 이 전 특보에게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 데 남측에서 날 너무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더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 전 특보는 충남 서산에 있는 한서대의 전임교수를 맡았다. 그러면서도 "남북회담이나 교류.협력에 기여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현장에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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