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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승패는 전쟁터가 아니라 장수의 장막에서 갈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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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속에서 천리 밖 전쟁의 승부를 갈랐다는 모략의 귀재 장량의 모습이다. 청대 유명 화가 장풍의 작품으로, 생전“여성과 같은 외모였다’는 장량의 모습을 그렸다.

중국 전쟁의 역사에서 크게 주목받은 싸움 중 하나는 초(楚) 패왕 항우와 한(漢)의 유방(劉邦)이 벌였던 천하의 패권 쟁탈전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싸움의 승자는 한 왕조를 일으킨 유방이다. 패업을 달성하고 황제 자리에 오른 유방이 어느 날 건한 파티를 열었다. 왕조 창업을 이룬 축하 파티였으니 그 자리가 얼마나 성대했을까. 지금의 뤄양(洛陽)에서 벌인 이 연회에서 유방이 얼큰하게 술을 걸친 뒤 묻는다. “나는 왜 승리했으며, 항우는 왜 내게 패했을까?”

머뭇거리던 공신들은 다양한 답을 내놓는다. “유능한 인재를 보내 적의 성채와 전략 요충지를 잘 공격한 덕입니다” “유능한 사람에게 그에 어울리는 벼슬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등이 그 내용이다. 이 자리에서 공신들이 내린 결론은 대개 이렇다. “항우는 그 반대다. 거느리고 있던 인재를 쓰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하가 공을 세워도 그에 맞는 상을 내리지 않았다. 어질고 똑똑한 사람이 되레 의심을 받았으니 항우의 실패는 당연했다”는 것.

공신들의 대답을 들은 유방은 이런 분석을 받아들이면서도 토를 달았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 중에서 전략적 사고가 가장 뛰어났던 장량(張良)을 거론했다.
“장막 안에서 펼친 계략이 천리의 바깥에 있는 전쟁터에서의 승리로 이어진 점에서 짐은 자방(子房·장량의 字)에 미칠 수 없었다(夫運籌<5E37>幄之中, 決勝千里之外, 吾不如子房).”

중국 역사의 아버지 격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일화다. 여기서 장막을 가리키는 유악(<5E37>幄)이라는 단어는 장수가 전쟁터에 나가 치는 일종의 텐트다. 말하자면 전쟁을 지휘하는 사령탑. 계략의 운용은 ‘운주(運籌)’로 표현했다. 주는 직역하자면 셈 가지의 일종이며,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포커 판의 ‘카드’다.

따라서 유방이 장량을 표현한 말을 다시 풀어 보면 “장막 안에서 미리 구성하는 모든 책략이 멀리 떨어진 전쟁터에서의 승리로 이어지는 점에 있어서는 짐이 장량의 재주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사마천은 『사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라는 대목에서 그를 다시 이렇게 정리했다. “장막 안에서 펼쳐진 장량의 계략은 전혀 상상치 못한 곳에서도 승리를 만들어 낸다(制勝于無形).”

중국의 전통적인 전쟁은 이 무형에서 뽑아내는 승리를 더 중시했다. 먼 곳에서 실제의 싸움은 벌어지지만 그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은 그곳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장막 속이다. 무형의 계략과 전쟁의 안팎을 이루는 다른 여러 원인이 싸움에서의 이기고 짐을 가른다는 얘기다. 이는 싸움에 대한 사고의 영역에서 중국이 서양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최근 번역돼 주목을 받고 있는 책이 있다. 프랑스의 중국학 전문가 프랑수아 줄리앙이 지은 『사물의 성향: 중국인의 사유방식』(박희영 옮김·한울아카데미)이다. 다양한 측면에 걸쳐 중국과, 서양 문화의 뿌리를 이루는 그리스를 비교했다. 저자는 중국과 서양의 전쟁 방식에 대해 이런 비교를 펼친다.

“중국인에게 병법의 목표는 실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그리고 실제 전투에서 패배할 수도 있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힘의 관계에서 나오는 경향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것에 있다.” “반면에 그리스인의 이상은 호메로스가 묘사한 소규모 전투나 일대일로 맞싸우는 결투의 시대가 지난 후에도 ‘완전한 승리 또는 완전한 패배’로 결말이 나는 정규전이었다.”

서양의 전통적 전쟁 방식에서 ‘산적이나 도둑이 사용하는 교활한 수법으로’ 승리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은 공명정대한 육박전만을 정정당당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분석한다. 저자는 나아가 “적과 직접 대면해 벌이는 결전은 유럽의 근대적 전쟁 개념-특히 클라우제비츠에서-찾아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비해 중국은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이 아닌 ‘장막 속’에서의 계책이 승부를 가르는 지름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저자는 그 예로 중국에서 발달한 ‘쇠뇌(弩)’라는 무기에 주목한다. 활보다 멀리 화살을 날려 보내는 장거리 무기다. 직접적이면서도 즉흥적인 백병전과 육박전을 피하는 전통이 결국 장거리 살상용 쇠뇌가 중국에서 먼저 출현한 이유라고 저자는 갈파한다.

장막 속에서 벌어지는 무형의 계책,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쇠뇌의 화살. 중국의 전통적인 싸움터에서 왜 모략이 중요시되는지를 보여 주는 아이템이다. 병법은 중국의 유가와 도가 등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 가장 먼저 태동한 사유방식이다. 말하자면 중국 사상의 근간이라 해도 좋은 사고체계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취급하는 것은 모략이다. 이 모략은 사람이 맞이하는 다양한 상황에 따라 갈래가 매우 복잡한 전략과 전술로 발전한다.

높게는 나라와 나라가 존립이냐 패망이냐를 두고 벌이는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 낮게는 잔돈을 두고 벌이는 장사치의 흥정으로도 나타난다. 현대 중국의 대외 전략과 자원 확보를 위해 거침없이 뛰어드는 중국의 국영기업, 냉혹한 싸움이 벌어지는 중국 부동산 업계의 다툼도 이 모략이 바탕을 이룬다. 그 모략의 대가인 손자(孫子)는 “병법의 운용은 물(水)같이 하라”고 했다. 왜 물일까.

유광종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kjy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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