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북-미 합의 팽개쳐도 괜찮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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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행정부의 대북 (對北) 지원예산이 17일 미국 하원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지난 94년 마련된 북.미간의 북한 핵동결에 관한 제네바합의 이행이 난관에 부닥쳤다.

다음달부터 집행하게 될 99회계연도 예산심의에서 제네바 합의에 따라 미국이 북한에 지원하기로 한 중유공급을 위한 3천5백만달러의 예산이 삭감된 것이다.

이에 앞서 북한이 핵무기의 획득과 개발을 추진하지 않고 미사일 수출을 중단한다는 것을 행정부가 입증해야만 내년도 대북 지원예산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상원이 조건부 승인한 사실과 아울러 미 의회내에 반 (反) 북한 분위기가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의회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경화되고 있는 것은 북한 핵연구 중심지인 영변 (寧邊) 주변 지하시설에 대한 최근의 의혹과 미사일개발 동향에 대한 반응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 행정부가 요청한 예산은 제네바합의에 따라 경수로 2기가 완공될 때까지 미국이 해마다 50만t씩 북한에 제공키로 한 중유구입 비용으로 이 예산의 집행이 차질을 빚으면 북한의 핵을 동결키로 한 제네바합의 이행은 사실상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될 경우 94년 이전처럼 또 한차례의 긴장이 한반도를 위협하게 될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은 지난 몇달간 미국의 중유공급이 원활하지 않다며 원자로의 폐연료봉 봉인작업을 중단하는 등 핵합의 이행을 유보하겠다고 위협해 왔었다.

물론 미 의회의 이러한 태도가 절차상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의회의 태도가 정책집행에 큰 영향을 주므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제약받게 마련이다.

미 의회의 이러한 태도는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없지도 않다.

핵동결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의혹을 풍기며 미사일과 같은 대량살상 무기를 생산하는 북한에 대한 중유지원은 그같은 공격적 행위를 부추기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반도 핵위기의 재발은 우리뿐 아니라 미국에도 재앙이다.

미 국무부가 18일 "미.북 기본합의는 94년 한반도가 전쟁 일보직전까지 가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도출해 낸 최선의 대안이었다" 고 입장을 밝힌 점을 미 의회는 유념해야 할 것이다.

또 제네바합의의 이행이 차질을 빚으면 미국이 주도해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는다는 도덕적 비판까지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에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도 언제까지나 극단적인 위협을 통해 정치.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더욱 위협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이미 얻은 것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이번 미 의회의 태도는 보여주고 있다.

미.북 합의가 이행되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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