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보이’ 박태환, 장거리 - 단거리 사이에서 길을 잃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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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믿을 수가 없다. 박태환이 당연히 우승할 줄 알았고, 관심사는 그가 세계신기록을 세우느냐 여부였는데….”

박태환이 자신의 주종목인 자유형 400m예선에서 조 3위로 들어온 뒤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박태환은 3분46초04의 부진한 기록으로 예선 탈락했다. [로마=연합뉴스]

이탈리아의 스포츠전문지 가제타델로스포르트의 제나로 보자 기자는 박태환(20·단국대)이 자유형 400m에서 예선 탈락하자 연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본 기자들도 “깜짝 놀랐다. 일본은 꿈도 못 꿨던 자유형 세계대회 2연패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고 말했다.

박태환은 26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2009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400m 예선에서 3분46초04의 저조한 기록으로 전체 12위에 그쳐 8명이 겨루는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박태환은 경기 직후 “전반에 페이스가 떨어졌고, 후반에도 따라잡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번 실패는 언뜻 박태환의 개인 문제로 보이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수영 후진국’ 시스템에서 고군분투했던 ‘세계 정상급 선수’의 남 모를 고민이 곪아 터졌다는 분석이다.

#장거리-단거리 사이에서 길을 잃다

박태환은 이번 대회 전 두 차례 미국 전지훈련에서 자유형 1500m 기록 향상을 위한 지구력 훈련에 집중했다. 수영 전문가들은 중장거리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게 지구력이라고 말한다.

마이클 펠프스(미국)의 개인 코치 밥 바우먼은 “수영에서 지구력은 은행 저축과도 같아서 잔액을 쌓아 놓고 조금씩 인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체육과학연구원 송홍선 박사(수영담당)는 “박태환은 단거리 선수가 갖춰야 할 속근을 타고난 상태에서 꾸준한 훈련을 통해 지구력을 만들었다. 이게 중장거리인 자유형 400m 세계 정상에 선 비결”이라면서 “박태환이 지구력을 가장 끌어올렸을 때가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이다. 그때의 지구력을 이후에 조금씩 빼먹은 셈”이라고 말했다. 박태환은 도하 아시안게임 이후 자유형 1500m 기록이 점차 하락했고, 이번 대회 전 목표를 지구력 향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노민상 경영대표팀 감독의 말은 달랐다. 노 감독은 지난해 말 “태환이는 스프린터(단거리 선수)로서 더 경쟁력이 있다. 앞으로 자유형 400m와 200m, 100m까지 도전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노 감독과 박태환 개인 훈련의 방향이 애초부터 달랐고, 어느 쪽이 옳은지 여부를 떠나 이는 끊임없는 잡음으로 이어졌다.

#태릉선수촌-전담팀 딜레마

박태환은 그동안 훈련방식에 변화가 많았다. 그는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직후 노민상 감독과 결별을 선언하고 스피도 전담팀을 구성했다. 이 체제에서 2007년 멜버른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400m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전담팀 감독 교체 등 내홍을 겪은 끝에 2008년 초 대표팀에 다시 들어가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그 이후에는 SK텔레콤 전담팀과 미국 전지훈련을 하면서 한국에서는 태릉선수촌에 출퇴근하는 방식으로 훈련을 해왔다. 박태환은 자유형 400m 예선 탈락 직후 “훈련이 부족하진 않았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했다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태환은 전담팀 혹은 대표팀 중 한쪽만을 택해 훈련에 집중했을 때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표팀과 전담팀을 오가는 어정쩡한 상황에서 훈련했고, 그나마 대표팀과 수영연맹 관계자들 사이에서 “박태환이 훈련을 게을리한다”는 등 안 좋은 말이 새어나오기도 했다. 동료들과 레벨이 다른데 대표팀 훈련에만 올인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대표팀을 배제한 채 완벽한 개인훈련을 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이는 결국 예선에서 페이스 조절과 컨디션 조절에 모두 실패하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평가다. 훈련시스템 안에서 길을 잃은 박태환에게 한국 수영계의 그 누구도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고, 결국 박태환이 모든 책임을 안고 “국민들께 실망을 드려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인 셈이다.

로마=이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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