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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대물림, 돈이 아니라 책 읽기로 끊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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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12면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서울시는 ‘인문학’이 빈곤 탈출의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언뜻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오세훈(사진) 서울시장의 생각은 확고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빈곤탈출’ 해법

20일 ‘엄마 우리도 잘살 수 있는 거지?’라는 주제로 열린 경희대 특강에서 오 시장은 “가난의 대물림을 끊으려면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돈은 한 번 쓰면 없어지지만 교양·문화 같은 정신적인 힘은 영원한 밑천이라는 것이다. 이날 특강에는 노숙인 400여 명을 포함한 서울시 저소득층 13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희망의 인문학 과정’ 수강생이다.

오 시장은 먼저 ‘삼양동 판자촌’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공개했다. 전기가 없어 호롱불을 켜고 살고, 물을 길어다 먹었으며, 싸라기밥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혹은 굶으면서 유소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시멘트하고 모래하고 개어 가지고 틀로 딱 뽑아 한 이틀 말리면 브로크(블록)가 되는데 그걸 쌓으면 벽이 되고, 그 안에 신문지 바르면 방이 되고, 슬레이트 얹으면 지붕이 되죠. 그런 집에서 살았어요. 어릴 땐 집이라는 게 2~3일 만에 지어지는 것인 줄 알았어요. 학교 갔다 오면 동네에 그런 집이 하나씩 늘어나곤 했거든요.”

그런 불우한 환경에서 오 시장을 일으켜 세운 동력은 다름아닌 독서였다.

“비록 어렵게 컸지만 저희 부모님은 제가 끊임없이 책을 보게 했습니다. 가난을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적인 가치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 해 준 독서하는 습관때문이었지요.”

그러면서 오시장은 ‘왜 인문학인지’를 역설했다.
“인문학이야말로 세상과 잘 지내는 방법,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 외부의 자극에 심사숙고해 대처하는 방법, 가족·이웃·동료들과 협상하는 방법,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립의지를 깨우쳐 줍니다.”

인문학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프랑스의 지성, 부르디외의 예를 들었다.
“이 사람은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였죠. 그런데 가난한 집 출신으로 일류대에 갔더니 친구들과 대화가 안 되더라는 겁니다. 쓰는 말이 다르고, 대화 내용이 다르니까요. 결국 문화적 경험의 격차가 부와 신분의 차이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나온 이론이 문화자본론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계속 가난하게 살까. 그건 잘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정신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죠.”

희망플러스 통장, 꿈나래 통장, SOS 위기가정 특별지원, 디딤돌 사업 등 서울시가 시행하고 있는 복지 정책을 열거한 오 시장은 “가난의 대물림을 끊는 것은 결국 교양의 문제이고 문화의 문제”라며 “서울시는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희망의 인문학 과정’을 통해 빈곤층에 자립의지를 다질 기회를 드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전체 예산의 23.5%인 4조2953억원을 들여 추진하는 ‘서울형 복지 정책’의 성공 여부가 다름 아닌 인문학에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 희망의 인문학 과정=서울시의 ‘희망드림프로젝트’의 하나로 노숙인을 포함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글쓰기·철학·역사 등을 가르치는 과정. 미국의 문필가 얼 쇼리스가 만든 ‘클레멘트 코스’가 모델이다. 얼 쇼리스는 1995년부터 뉴욕의 노숙인과 알코올 중독자, 빈민들에게 철학·시·미술을 가르쳤다. 첫해의 수강생 31명 중 17명이 끝까지 강의에 참석해 나중에 대학에 가거나 직장을 얻었다. 지난해 처음 개설된 희망의 인문학 과정도 수강생 313명 중 209명(66.7%)이 마지막 수업까지 자리를 지켰다. 올해는 참여 인원이 1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경희대·동국대·서울시립대·성공회대에 강좌가 개설됐으며, 각 대학 교수들이 강사로 참여한다. 영화배우 정준호·김선아, 소설가 공지영, 시인 도종환씨도 특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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