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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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 이렇게 노래한 민족의 시인 혜산 박두진 (朴斗鎭) 씨가 타계했다.

그는 82해의 생애를 통해 천생 (天生)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만 살았다.

30권에 이르는 시집을 남겼다.

그의 시는 그가 살아 온 세월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절망과 혼돈에 대한 절규일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시는 절망의 뒤에 있는 구원자의 존재를 항상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원자를 탐구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시는 비탄이나 한 (恨)에 빠져들지 않고 항상 강건 (剛健) 했고 절제를 지켰다.

그의 시세계에서 나타나는 구원자는 상식처럼 기독교적이지만은 않다.

'해야 솟아라' 에서처럼 차라리 샤머니즘적이기도 했다.

다만 그의 언어는 무당의 그것과는 달리 자신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새 시대에 태어난 어린 아이의 새 말로 그는 솟아 올라야 할 '해' 를 초혼 (招魂)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년에 그는 수석 (水石) 탐구에 몰두했다.

돌 다움의 추상성 (抽象性) 이 그에게 구원자로 등장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돌을 주제로 삼은 시만 오랫동안 썼다.

아마도 무생물 구조가 갖는 아름다움에서 생명을 발견하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시적 영감을 줄 돌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처절했다.

겨울의 얼어붙은 강변에서 그는 드러나지 않은 돌의 밑동을 캐려고 허구한 날 호미질을 해댔다.

청록파 (靑鹿派) 로 알려진 해방 전후 가장 청신한 시어 (詩語) 를 다루던 세 사람의 시인중 그는 가장 오래 생존했다.

그 가운데 목월 (木月) 의 시는 소박했고 지훈 (芝薰) 의 시는 묵직했다.

혜산의 시는 겉은 조용하고 속은 늘 뜨겁게 끓었다.아직 생존해 있는 미당 서정주 (徐廷柱) 와 이들 청록파 시인의 시대가 만들던 한국시의 놀라운 새로움은 지금은 사라졌다.

80년대 이후 한국의 시 창작은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미혹 (迷惑) , 그리고 전환기적 혼돈 속에서 대체로 지리멸렬이라고 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한국의 시 창작의 새로운 부흥은 혜산이 언 강변에서 점심마저 거르며 종일 수석을 캐고 있던 그런 구도자의 자세로 지금세대 시인들도 들어서야 올 것 같다.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는 언제까지나 '해야 솟아라' 와 함께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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