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커버스토리]부도 맞느니 문닫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건설중장비 부품을 만드는 경기도시흥시 시화공단내 D기계. 3백여평의 공장에는 각종 공구와 만들다 만 철구조물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 망치소리 한번 들리지 않는다.

직원들도 거의 눈에 띄지 않고, 4~5명 정도가 출입구 근처에 모여 앉아 잡담만 나누고 있다.

한 직원은 "20명의 직원이 조를 나눠 한달씩 번갈아 근무하지만 워낙 일감이 없어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 라고 하소연했다.

이 회사 임모 전무는 "우리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 이라며 "아예 폐업한 곳도 수두룩하다" 고 말했다.

실제로 D기계에서 50여m 떨어진 정우기계공업.원진기공 등은 아예 철문이 굳게 닫혀 있고, 문은 열었지만 직원들이 놀고 있는 곳을 찾기도 어렵지 않다.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박광배 (51) 씨는 "올초보다 최근 문을 닫는 업체가 더욱 늘고 있어 점심시간조차 썰렁하다" 며 "공단 (工團) 이 아니라 공단 (空團)" 이라고 울상을 지었다.

휴폐업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심각한 내수.수출부진으로 일거리가 없다 보니 아예 자진해 문을 닫거나 사실상 닫다시피하는 것이다.

산업단지공단 서부지역본부 방인혁과장은 "요즘은 부도 전에 미리 문을 닫는 회사가 늘고 있다" 면서 "이러다 보니 업계의 체감 (體感) 경기는 낮아지는 공식 부도율과는 정반대로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다" 고 말했다.

◇ 현황 =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2만3천여개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월말 현재 공식적인 휴폐업 업체는 7백72개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두배 이상 늘어난 규모. 7월 한달만도 휴업업체 1백13개, 폐업업체는 54개에 달했다.

중기협 최윤규 부장은 "휴폐업을 신고하는 곳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데다 7월 이후 가동률이 60% 아래로 떨어진 점을 감안하면 실제 휴폐업 업체는 3천2백여개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고 말했다.

시화공단 임찬호 총무팀장은 "많은 업체들이 소문도 없이 공장을 닫거나 놀리고 있어 직원을 현장으로 내보내거나 소문추적을 통해 현황을 파악하고 있다" 고 밝혔다.

실제로 원진기공.남전 등 폐업업체들은 공단이 조사한 자료에 등재돼 있지 않았다.

◇ 사실상 개점휴업 = S정공의 경우 대기업 납품물량이 급감, 직원을 절반으로 줄인 데 이어 최근엔 1주일에 3일씩만 출근토록 하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겨우 공장을 꾸려가고 있다.

S기계공업은 20명 직원이 한달씩 교대로 출근하다 최근에는 일이 있을 때만 직원을 불러 작업하는 '품팔이'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물론 직원들은 의료보험.국민연금의 혜택도 받지 못한다.

회사가 문을 닫은 뒤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자 몇몇 직원들이 회사를 꾸려나가는 경우도 있다.

드릴 못을 생산하던 새한금속 직원이던 한진배 (35) 씨는 "회사 폐업 이후 한 동료와 기계를 무상임대해 물건을 만들고 있다" 며 "보수는 형편없지만 거리에 내쫓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고 말했다.

2천6백여개 업체중 1백99개가 휴폐업중인 인천 남동공단, 3백60여개중 53개가 휴폐업중인 경북 구미공단 등 전국 공단 등도 사정은 비슷하다.

◇ 문제점과 대책 = 우선 내수.수출이 극도로 침체돼 일감이 적은 데다 그나마 돈이 없어 제때 공장을 굴리기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각종 지원책을 발표하긴 했지만 부동산가격이 급락한 상태라 담보가 없는 데다 신용보증기금이 요구하는 심사과정.보증인 요구 등의 조건을 만족시키기가 물건팔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

성창철강 오영석 차장은 "실효성없는 대책 10가지보다 똑부러지는 하나의 정책이 아쉽다" 며 "퇴출은행의 인수은행들이 기존 대출조건은 모두 무시하면서 대출금 조기상환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만이라도 빨리 시정돼야 할 것" 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우성아이비 이희재 사장도 "무조건 돈을 풀기보다는 무역금융 대출금리와 무역어음 할인율 인하, 기초 원부자재 수입관세 인하 등 실질적 정책이 필요한 시점" 이라고 주장했다.

산업연구원 양현봉 박사는 "부도와 달리 휴폐업은 산업기반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만큼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며 "더 이상의 국가적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현장조사를 통한 정책수립과 실행 여부에 대한 철저한 점검이 이뤄져야 할 것" 이라고 강조했다.

김준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