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창덕궁에는 피바람이 몰아쳤다. 구식 군인들은 왕십리와 이태원 지역의 빈민들과 합세해 돈화문을 넘어 궁궐로 밀려들어갔다. 민비는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 집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선혜청 당상 민겸호, 경기감사 김보현, 그리고 별기군 훈련담당 일본인 교관 등은 그들의 칼날에 목숨을 앗겼다. 분노한 군민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려워지자 하나부사 공사는 공사관에 불을 지른 후 본국으로 도피했다. 다음 날 대원군이 9년 만에 다시 권좌에 올랐다. 수구(守舊)의 물결이 온 나라에 넘실대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8월 1일 청군 3000명이 이 땅에 들어오고 8일 300여 명의 일본군도 진주하자, 임오군란은 국제 문제로 비화했다. 26일 대원군은 납치되어 청국 보정부(保定府)에 유폐되었다.
33일 만에 정권은 다시 고종과 민씨 척족의 손으로 돌아갔지만, 청국의 내정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일본도 군란을 빌미로 30일 수호조규 속약과 제물포조약을 강요해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공사관 호위 병력의 주둔권을 얻어내는 등 실리를 챙겼다. 그러나 최대 수혜자는 청국이었다. 10월 4일 맺어진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서문에는 조선은 청국의 속국임이 명시되었고, 청국 상인은 일본 상인보다 더 큰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1880년대 초 청국과 일본의 대조선 무역 점유율은 10%대 90%로 일본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날 무렵 45%대 55%로 그 격차가 좁혀졌다. 청·일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던 그때나 오늘이나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는 다름없다.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 같은 정치판을 보며, 위정자들이 내우(內憂)는 외환(外患)을 부른다는 임오군란의 교훈을 되새기길 바랄 뿐이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