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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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주문진 선착장에 있는 영동식당에 윤종갑이 나타난 것은 다른 일행이 안동장에 도착했던 바로 그 날 밤이기도 했다.

공한지에서 구타당한 이후로 문 밖 출입도 삼가며 칩거하던 그가 홀연히 가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외양은 왜소하지만 통감자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야무지고 당찬 봉환이 윤씨쯤 나타났다 해서 찔끔할 것은 아니었다.

어떤 시빗거리가 있다 해도 혼자서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종갑은 케케묵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 시각을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술청이 텅 비어 있던 해거름녘에 술청으로 들어선 그는 우정 목소리를 가다듬어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봉환을 이끌었다.

봉환 역시 심란하기 짝이 없던 참이었고, 그가 시비를 가리자 하여도 배짱이 모자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질투가 나서 고시랑거리는 묵호댁에게 욕사발을 안겨준 뒤 대뜸 뒤따라 나서고 말았다.

인적없는 골목으로 끌고가서 몽둥이 찜질할 엉뚱한 생각은 아예 하지 마소. 몽둥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깡패 출신인 줄 알아? 그런 행패를 부리려면, 어둑한 한밤중에 찾아왔지, 눈총 많은 대낮에 왔겠나. 임자가 몽둥이질 곱게 당하고 있을 사람도 아니고. 불각시 나타나서 내한테 술 사겠다는 까닭은 나변에 있소? 속셈이나 알고 갑시다.

내가 밥사겠다 했지 술 사겠다 했나? 밥이든 술이든 임자에게 해코지될 짓은 안할 테니까, 걱정 말고 따라오게. 가게에서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었고, 후미진 골목 안도 아니었다.

선착장 동쪽 부근이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이는 번듯한 횟집 별실이었다.

그러나 주문한 횟감과 술이 식탁에 놓이고, 술잔 서너 순배가 돌 때까지 윤종갑은 상투적인 농담이나 건넬 뿐 알맹이 있는 수작은 건네지 않았다.

필경 봉환이 거나해질 때를 기다리자는 속셈이었다.

그런 눈치쯤이야 진작 알아채고 있었지만, 윤종갑의 속내가 궁금했던 것은 어차피 봉환이었으므로 짧은 시간에 두 병 소주를 대책없이 들이켜고 말았다.

결국 채근한 사람은 봉환이었다.

"뭔 말을 할락꼬 나를 불러냈는지, 뜸을 그만치 들였으면 인제는 속시원하게 콱 쏟아냈뿌소. 내한테서 주먹 나올까봐 겁나서 우물쭈물하고 있어요? 그 걱정은 하지 마소. " "물론 할 말이 있어서 임자를 불러낸 것은 틀림없지만, 막상 얘기를 꺼내려니 이럴 땐 말 않는 게 약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 고쳐먹기로 하였으니 저녁이나 먹고 헤어지는 게 좋겠어.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닌건데, 내가 공연히 임자를 충동질한 거 같군. "

"내가 형님 소갈머리를 모를 것 같으이껴? 그런 말로 나를 충동이질해서 부아를 끓게 만들어 숭어뜀을 시키려고 한다는 걸 모를 줄 알아요?" "그 말 맞어. 임자가 홧김에 애꿎은 횟집의 기물을 부수거나 나를 창 밖으로 내던져버릴까 겁나서 도저히 발설을 못하겠어. 그만 없었던 일로 하고 술이나 마시고 가. "

언제부턴가 벌겋게 충혈된 봉환의 두 눈이 윤종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속셈이 무언지 당장 손에 잡힐 듯 같으면서도 어느 한순간 오리무중 속으로 가물가물 사라지곤 하였다.

그 사건 이후로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던 위인이 불쑥 봉환을 찾아온 시점이 미묘하다는 생각이 들고부터 가슴 속으로 엉켜드는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봉환의 심상찮은 눈길을 알아챈 윤씨가 자리를 고쳐앉으며 허두를 떼었다.

"임자가 내 말을 듣고 난 뒤에 행패를 부린다거나 식칼을 빼앗아 들고 설쳐대지 않는다고 약조만 굳게 한다면, 내가 또 다시 마음을 고쳐 가질 수도 있지. "

"그거는 약조를 못하겠소. 내도 내가 누군지 모를 때가 많은데, 말도 안 들어보고 그런 엄청난 약조를 할 수야 없지요. 내 고정상표가 행패 부리다가 병원에 들어가 눕는 겐데, 강다짐부터 받아서 묶어두려는 속셈은 나변에 있어요? 그러나 오늘만은 행패부리는 불상사는 없도록 할 테니까, 툭 털어놔 보소. 그러나 거짓말하면, 이 약속은 파기되는 거라요.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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