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족집게 과외' 통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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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수험생과 학부모의 불안을 노린 고액 과외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성격으로 볼 때 단기간의 족집게 과외로 점수를 대폭 올려놓을 수 있다는 말은 '고객' 의 불안을 악용해 금품을 노린 사기행각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첫째,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단편적 지식을 측정하는 시험이 아니라 자료 해석.원리 응용력.논리적 분석력.판단력 등과 같은 고차적 사고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으로서 단기간의 과외학습으로는 이같은 능력을 향상시킬 수 없다.

사고력은 단기간에 단편적 지식을 많이 암기한다고 해서 향상되지 않으며, 사고하는 방법은 주입식의 학습으로는 길러지지 않는다.

이러한 능력은 평소 수업을 통해 기본개념과 원리를 바르게 이해해 이를 다양한 상황에 적용.분석.종합 판단해보며, 폭넓은 독서를 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둘째,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문항들은 다양한 전공의 출제진이 공동으로 출제하고 검토해 문항을 만든다.

또한 대부분의 문항이 여러 교과나 단원이 관련된 소재를 이용하는 통합교과적, 또는 통합단원적인 것이므로 특정 전공 영역 배경을 지닌 개인 과외교사에 의한 '족집게 과외' 법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험생들은 낯선 방법으로 대처하기 보다 자신이 평소 해오던 공부방식대로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고 배운 바를 차분히 정리하는 것이 백번 낫다.

통합교과적으로 출제가 이뤄지는 데 대한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불안심리를 파고드는 사설학원 과외강사들의 유혹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성격을 잘못 이해한 가운데 서로 속이고 속고 있을 뿐이다.

셋째,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출제진이 공동으로 협의하고 노력해 새로운 유형의 문제들을 개발, 출제하므로 기왕에 출제된 문제를 정형화된 방식으로 다루는 '족집게 과외' 는 별 효과가 없다.

이번에 밝혀진 대로 고액과외 강사들이 써오는 상투적 수법은 학교시험이나 모의고사 문제를 미리 빼내 답을 알려 주고 시험성적을 올리는 식이라고 한다.

이런 방법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과외강사가 먼저 아는 일이다.

넷째,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나타내는 학생들은 대부분 평소 학교수업에 충실해 심리적으로 안정된 가운데 폭넓은 독서와 생각하는 습관을 지녔다는 특징이 있다.

학부모들은 안쓰런 마음에서 고액과외에 의지하고자 하나 학생의 능동적.자율적 학습이 전제되지 않은 과외수업은 학생들의 심신만 피폐시킬 뿐이다.

학부모들이 언제까지 자녀들을 이런 식으로 돌봐줄 수는 없다.

타인 의존적인 과외법은 학생 스스로 공부하고 생각하는 습관과 능력, 곧 지적 독립성을 현저히 약화시키게 되므로 사고력 중심의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대비한 공부법으로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과외가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별 효과가 없다는 증거는 각종 연구 보고서 및 과외공부에 대한 체험담, 각 언론사의 보도내용을 통해서도 밝혀지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97년 5월 4년제 일반대학 신입생 1천5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효과적인 준비방법은 '학교수업 충실' 이 48.7%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과외가 효과가 있었다고 응답한 비율은 11.7%에 불과했다.

또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서울대 교육연구소와 공동으로 실시한 '과외 실태조사' 결과 (97년 5월)에 따르면 대학생의 경우 대학 진학에 과외보다 평소 학교수업이 훨씬 많은 도움이 됐다고 응답했다.

요즘 서울 강남 일원에서 고액과외 파문에 휩싸인 학생들조차 고액 '족집게과외' 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실토했으며, 일부 학생들은 그 폐해를 입어 강사가 합격을 약속한 대학에 낙방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9월 1일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원서의 교부 및 접수가 시작됐다.

시험을 앞둔 학부모들의 불안한 심정은 이해가 되나 성장을 향한 진통으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할 일이지, 돈의 힘으로 점수를 사주려고 한다면 오히려 돈을 들여 자식을 망치는 셈이 된다.

고액과외라는 '불법' 을 저지르는 수험생은 다른 수험생들이 갖지 않은 또다른 불안을 더하게 될 뿐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불안심리를 악용하는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수험생들은 평소 해오던 방식대로 의연하게 공부하고 준비할 일이다.

선형기 (교육과정평가원 고사관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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