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숙씨가 움직일 수 있는 왼손의 세 손가락으로 애니메이션 ‘외출’에 등장하는 인물을 그리고 있다. 은숙씨는 애니메이션 속 외출을 꿈꾸는 주인공처럼 자신의 외출을 준비하고 있다. 아래 작은 사진은 ‘외출’의 한 장면. [김상선 기자]
은숙씨는 세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다. 곱은 채로 굳어 있는 왼손의 엄지·검지·중지다. 손 전체가 아이 손처럼 작다. 손아귀 힘이 없어 연필도 꼭 쥐지 못한다. 하지만 이 세 손가락은 그에게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평생 재활원에서만 살았을지도 모를 그를 다시 바깥 세상으로 나오게 해 준 고마운 손가락.
은숙씨는 아홉 살 때 사고로 목을 다쳐 어깨 아래가 마비됐다. 세 손가락을 빼면 감각조차 없다. 아침이면 룸메이트인 도우미가 그를 일으켜 씻긴 뒤 휠체어에 앉힌다.
포기하지 않던 그의 바람은 스무 살 되던 2007년에 이뤄졌다. 삼육재활센터에 봉사활동을 왔던 성균관대 이명학 교수가 은숙씨 사연을 듣고 지인들과 함께 학비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청강문화산업대 애니메이션학과는 장애를 딛고 합격한 은숙씨에게 1층 기숙사를 마련해 줬다. 월 30만원에 도우미를 자청한 친구가 그와 한방을 쓰고 있다.
8년 만에 나온 세상은 낯설었다. 대학 생활의 낭만은 그와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휠체어 바퀴는 강의실 문턱에 걸렸고, 손에 쥔 펜은 끊임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수업 도중 화장실이 급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더딘 손놀림이다. 애니메이션은 초당 18~24장의 그림으로 이뤄진다. 10분짜리 작품 하나를 완성하려면 최대 1만4000여 장의 그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대학 동기들은 보통 1, 2분이면 한 장을 그려내지만, 은숙씨는 열 배 넘는 시간이 걸린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밤 11시까지 그림만 그린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주인공들은 친구도 많고, 어디든 다닐 수 있죠. 대리 만족을 느껴요.” 그는 유난히 ‘외출’의 주인공에 애정이 간다고 했다. “바깥 세상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저와 닮았잖아요.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그리고 싶어요.”
이야기 속 주인공은 외출을 중간에 포기하지만, 은숙씨는 주인공에게 더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말했다. “주인공도 언젠가 용기를 내어 아들과 함께 외출을 시작할 거라고 믿어요. 어렵게 외출을 시작한 저처럼요.” 3년 전 재활원을 떠나 첫 외출을 맛본 은숙씨는, 이제 더 멀고 긴 외출을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동화작가 정은숙’이란 꿈으로의 외출이다.
글=김진경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