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세 손가락은 움직인다 … 동화작가 꿈을 그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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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씨가 움직일 수 있는 왼손의 세 손가락으로 애니메이션 ‘외출’에 등장하는 인물을 그리고 있다. 은숙씨는 애니메이션 속 외출을 꿈꾸는 주인공처럼 자신의 외출을 준비하고 있다. 아래 작은 사진은 ‘외출’의 한 장면. [김상선 기자]

정은숙(22)씨가 이야기를 마쳤다. 청강문화산업대학 애니메이션학과 3학년인 그가 준비하는 ‘외출’이란 제목의 10분짜리 졸업 작품 줄거리다. 책상 위엔 직접 그린 그림 여러 장이 놓여 있었다. 슬픈 이야기와 달리, 그의 그림은 색감이 밝다. 노랑·연두·주황·연보라…. “밝은 색으로 그림을 칠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은숙씨가 웃으며 색연필을 쥔 왼손에 힘을 줬다. 그래도 색연필은 자꾸 흘러내렸다.

은숙씨는 세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다. 곱은 채로 굳어 있는 왼손의 엄지·검지·중지다. 손 전체가 아이 손처럼 작다. 손아귀 힘이 없어 연필도 꼭 쥐지 못한다. 하지만 이 세 손가락은 그에게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평생 재활원에서만 살았을지도 모를 그를 다시 바깥 세상으로 나오게 해 준 고마운 손가락.

은숙씨는 아홉 살 때 사고로 목을 다쳐 어깨 아래가 마비됐다. 세 손가락을 빼면 감각조차 없다. 아침이면 룸메이트인 도우미가 그를 일으켜 씻긴 뒤 휠체어에 앉힌다.

사고 이후 부모님은 갈라섰다. 불편한 몸으로는 보육원 생활도 어려웠다. 열두 살 때부터 그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삼육재활센터에서 자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재활원에서다. 중학교 2학년 때 일본 순정만화를 보고 만화에 빠졌다. 어눌한 손을 움직여 만화 주인공을 그렸다. 복잡하고 세밀한 선을 흉내 낼 순 없었지만, 점차 자신만의 스타일이 자리 잡혔다. 그의 그림은 선이 단순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난다는 평을 받았다. 그림을 그릴수록 더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커졌다. “어떻게 해서든 꼭 대학에 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은숙씨가 살짝 웃었다.

포기하지 않던 그의 바람은 스무 살 되던 2007년에 이뤄졌다. 삼육재활센터에 봉사활동을 왔던 성균관대 이명학 교수가 은숙씨 사연을 듣고 지인들과 함께 학비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청강문화산업대 애니메이션학과는 장애를 딛고 합격한 은숙씨에게 1층 기숙사를 마련해 줬다. 월 30만원에 도우미를 자청한 친구가 그와 한방을 쓰고 있다.

8년 만에 나온 세상은 낯설었다. 대학 생활의 낭만은 그와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휠체어 바퀴는 강의실 문턱에 걸렸고, 손에 쥔 펜은 끊임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수업 도중 화장실이 급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더딘 손놀림이다. 애니메이션은 초당 18~24장의 그림으로 이뤄진다. 10분짜리 작품 하나를 완성하려면 최대 1만4000여 장의 그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대학 동기들은 보통 1, 2분이면 한 장을 그려내지만, 은숙씨는 열 배 넘는 시간이 걸린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밤 11시까지 그림만 그린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주인공들은 친구도 많고, 어디든 다닐 수 있죠. 대리 만족을 느껴요.” 그는 유난히 ‘외출’의 주인공에 애정이 간다고 했다. “바깥 세상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저와 닮았잖아요.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그리고 싶어요.”

이야기 속 주인공은 외출을 중간에 포기하지만, 은숙씨는 주인공에게 더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말했다. “주인공도 언젠가 용기를 내어 아들과 함께 외출을 시작할 거라고 믿어요. 어렵게 외출을 시작한 저처럼요.” 3년 전 재활원을 떠나 첫 외출을 맛본 은숙씨는, 이제 더 멀고 긴 외출을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동화작가 정은숙’이란 꿈으로의 외출이다. 

글=김진경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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