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문화유산답사기]제2부 2.금강산 초입 온정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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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7월 9일 오전 8시40분. 우리는 평양 보통강려관을 떠나 금강산으로 향했다.

어제 밤부터 내리던 비는 점점 방울이 굵고 세차지더니 우리의 버스가 평양~원산간 고속도로에 들어섰을 때는 차창 밖으로 흩뿌리는 빗물 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하나라도 더 볼 마음으로 창가에 바짝 붙어있다가 거의 체념하듯 의자 등받이로 길게 누워버리자 곁에 있던 리정남선생이 걱정을 나누어 갖는 뜻으로 말을 건넨다.

"어제부터 본격적으로 장마에 들었답니다. " "특히나 금강산엔 비가 많다죠?" "많다 뿐입니까. 한반도에서 강우량이 가장 많은 곳이 금강산이랍니다. 그래서 한달 30일 중 비오는 날이 40일이라는 말까지 생겼어요. "

옛 사람의 금강산 기행문을 읽으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한탄의 소리가 비.안개 때문에 풍광은 고사하고 지척을 분간하지 못했다는 얘기들이다.

우리마저 그렇게 되면 어쩌나, 그런 생각에 꺼져라 한숨을 내쉬니 앞에 앉아 있던 '내나라 비디오' 의 리송근 (37) 촬영사가 한마디 거든다.

"그렇다고 교수선생 욕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금강산은 사람을 보아가며 좋은 분이 오면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합니다. " 평양에서 원산까지가 1백80㎞, 원산에서 금강산까지는 또 1백8㎞. 부지런히 가자면 대여섯시간 거리다.

그러나 우리는 원산 송도원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명사십리 모래사장에서 해당화도 보며 노닐었고, 또 시중호 (侍中湖) 휴게소에서 차도 마시고 호숫가.바닷가를 거닐며 마냥 늑장을 부리다가 오후 6시 다 돼서야 온정리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총석정으로 유명한 통천 (通川) 을 지나가면서 날이 활짝 개어 리송근 촬영사는 이번 방북단은 좋은 사람들인가 보다며 사기를 올려주었다.

온정리는 금강산 탐방의 거점이 되는 곳으로 북한에서 나온 '금강산의 력사와 문화' (1984년) 같은 책에서는 여관과 휴양시설이 즐비하다고 설명돼 있는데 내 눈에는 그저 소탈한 예사 시골마을로 비쳤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온정리엔 여관은 물론 근로자휴양소가 집단별로 예닐곱 군데 있고 유원지 상점.금강산온천.혁명사적관 등이 곳곳에 있는데 그것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숲속과 계곡가로 숨기듯 들어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악산이나 지리산 입구의 북적거리는 관광지와는 판연히 달랐다.

그만큼 관광인파가 적었다는 말도 되지만 맹탕으로 복잡한 것을 미워하는 그들 문화의 한 특징이기도 했다.

우리는 금강산려관에 여장을 풀었다.

금강산려관은 12층 건물로 객실 2백40개를 갖춘 유일한 관광호텔이다.

금강산려관에 당도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앞쪽에 버티듯 서있는 준수한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이렇게 수려한 산세를 전망으로 가진 호텔이 있다니! 나는 수위원에게 물었다.

"저 산이 무슨 산입니까?" "수정봉 (水晶峰) 입니다.

그 아래쪽에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이 둥글너부레한 봉우리는 바릿대 닮았다고 바리봉 (鉢峰) 이라고 하는데 동네 사람들은 치마바위라고도 합니다. "

수정봉이라! 내가 공부해 아는 바로는 외금강의 11개 명승구역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명산이다.

수정봉은 자연수정이 널려 있어 아침 햇살에 빛날 때면 산 전체가 수정처럼 반짝인다고 했고, 여기서 장전 (長箭) 항을 내다보는 전망과 동해 일출은 비로봉 일출에 버금간다고 했다.

노을에 비친 수정봉 왼쪽으로는 깊은 산세가 장엄하게 드러나 있는데 노적가리 모양의 산자락들이 시옷자를 계속 써나가듯 기세차게 겹겹이 뻗어간다.

거기가 어디인가 궁금해 안내지도를 펴보았지만 도시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다시 수위원에게 물으니 그는 손가락으로 봉우리마다 짚어가며 알려준다.

"수정봉 너머는 문주봉, 그 너머는 세지봉.만물상.옥녀봉으로 이어지고 왼쪽 줄기는 관음연봉이라고 해서 하관음.중관음.상관음봉입니다.

그리고 저 멀리 움푹 들어간 곳이 내금강으로 넘어가는 온정령 고갯마루입니다. "

그렇다면 여기는 외금강의 하이라이트인 셈이었다.

403호에 방을 배정받아 나는 얼른 짐을 던져두고 다시 여관 앞마당으로 달려 나왔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관음봉 아래 산골짜기로부터 뽀얀 안개가 일어나 삽시간에 수정봉까지 덮어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나는 비안개가 곧 걷혀 내일이나 모레 쯤엔 다시 수정봉의 빛나는 자태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거기 엿새동안 머물도록 수정봉은 끝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식사 때가 되어 여관 건너편 솔밭에 자리잡은 금강원식당으로 갈 때도 비는 사정없이 내렸다.

그래서 모두 음식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빗소리만 들리는지 걱정을 한짐씩 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쓸쓸한 분위기를 지우려고 접대원에게 수작을 걸어 노래를 시켰다.

그러자 접대원 유성숙 (24) 동무는 흔쾌히 한 곡 부르는데 놀랍게도 김민기의 '아침이슬' 이었다.

이 북녀 (北女)가 부르는 '아침이슬' 은 특이했다.

비장한 감정이 아니라 씩씩하고 멋들어지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사중 '서러움 모두 버리고' 를 '두려움 모두 버리고' 로 바꿔 불렀다.

순간 나는 이 노래의 예사롭지 않은 팔자를 생각했다.

한때는 금지곡이 되다가 양희은이 부를 때는 '태양은 묘지 위에' 를 '대지 위에' 로 바꾸어 부르더니 이젠 휴전선 너머 북녘땅에 와서는 서러움이 두려움으로 바뀐 것이다.

식당을 나오면서 나는 우산을 같이 쓰고 가려고 고은선생을 찾았다.

뒷간에 가신 줄도 모르고 큰 소리로 "고은선생님!" 을 고래고래 외치니 고은선생은 대답이 없고 리송근 촬영사가 내게로 다가와 놀란 빛으로 묻는다.

"아니! 저 분이 그 유명한 고은시인이십니까? 대표단 명단에 고은태 (高銀泰) 라고 씌어 있어서 나는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

이처럼 그들은 예술을 통해 남쪽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고은선생이 허리춤을 매만지며 나오자 리송근 촬영사는 나를 가로채며 고은선생께 새삼스럽게 예의를 갖추어 다시 인사드리더니 우산을 받쳐주며 앞서 나갔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름을 왜 바꾸셨습니까?" "바꾼 게 아냐. 귀찮아서 뒷글자를 끊어버렸지. " 좁은 우산 속에서 한 쌍의 남북인이 어깨를 맞대며 총총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글 = 유홍준 (영남대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 회는 '옥류동 (玉流洞) 구룡폭 (九龍瀑)'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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