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19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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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그때 웃었던 사람은 당사자인 태호 혼자였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들 다섯은 호텔 현관을 나섰다.

승희의 제안을 그녀들이 흔쾌히 받아들인 까닭이었다.

우산을 받으며 그들은 다시 해안의 모랫벌을 따라 한씨네들 좌판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비 맞은 차일막을 손질하고 있던 봉환이 승희를 보고 물었다.

쟤들 오징어 사러 왔나? 승희가 눈짓하자 눈치 빠른 봉환은 당장 낌새를 알아차리고 말문을 닫았다.

승희가 화덕에 불을 댕기려는 채비를 서두르는 사이, 봉환은 차일막을 나섰다.

해수욕장의 모랫벌 뒤편 이면도로에는 횟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횟집들마다 북적거리던 고객들이 비가 내리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빗자루로 쓸어낸 듯 한산했다.

봉환은 횟집들을 기웃거리면서 계속 걸었다.

한동안 이면도로를 거슬러 오르던 봉환이 걸음을 멈춘 것은 '파도횟집' 이란 간판이 걸린 점포 앞이었다.

변씨가 거기 혼자 앉아 있었다.

탁자에는 회접시에 소줏병이 놓여 있었으나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변씨가 봉환을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한 잔 할래?" 봉환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랜만에 변씨의 쓸쓸한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변씨의 본래 모습인지도 몰랐다.

자기를 숨기는 수완이 능수능란한 사람이 바로 변씨였다.

달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진솔한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는 일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그렇다 해서 그가 진솔하지 못한 사람이란 뜻은 아니었다.

비 내리는 해변에 소줏병과 마주 앉은 변씨의 모습에서 그가 애써 숨기려 했던 고적한 모습이 명경하게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었다.

봉환은 탁자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으며 뇌까렸다.

"소줏병하고 형님은 궁합이 딱 들어맞습니더. "

"왜? 그래서 기분 나뻐?" "옛날에는 잘 몰랐는데, 오늘보이 된장에 풋고추 궁합이라 카는기 형님하고 소줏병두고 한말로 보이니더. " "이 사람 보자하니, 그만 마셔려 했던 소주 마시게 만드네?"

"그만 마실라 캤으면 그만 일어서시더. " "일어서긴 어딜 일어서. 궁합 좋다는 얘기 들었을 적에 좀더 앉아 있지. " "해변 마담들은 어디로 쫓아뿔고 영월 동강 외가리처럼 혼자 우두커이 앉아 있습니껴?" "실연당했어. " "동작만 빠른 사람은 번갯불에도 콩 볶아 먹는다 카디, 연애한줄도 몰랐는데, 벌써 실연까지 당했다 말입니껴?" "그렇게 되었네. "

"거짓말 하지마소. 날 놀려먹자고 하는 흰소리겠지요. " 변씨는 픽 웃고 말았다.

그런 태도 역시 변씨에겐 낯선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봉환이야 믿건 말건 실연당한 내막을 시시콜콜하게 들려주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한씨네 식구들이 지켜야 할 도리로 알고 있었다.

봉환은 빈 잔에 소주를 채워주며 힐끗 변씨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느낌으로는 무표정이었다.

그 무표정이 오히려 변씨의 심상찮은 아픔을 농도 짙게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변씨의 시선을 따라 해변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모랫벌을 거닐고 있는 사람들의 수효가 오전보다 훨씬 불어나 있었다.

늙바탕의 홀아비가 여자와 사귀지 말란 법은 없지만, 정말 실연이라도 당했던 것일까. 변씨는 연거푸 석 잔의 소주를 들이켰다.

뭔가 위로가 될 만한 일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스친 것은 그때였다.

"실연 당했다 카이 썩 내키지는 않니더만, 우리가 품앗이를 해줘야 할 일이 생겼네요.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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