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미국대통령의 권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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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댄 래더는 1970년대 CBS방송의 백악관 출입의 스타 기자였다.

그는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위기에 몰린 리처드 닉슨에게 질문을 할 때 이렇게 시작했다.

"대통령직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묻겠습니다. " 대통령 자리 (Presidency) 는 존경하되 지금의 대통령인 닉슨 당신은 존경하지 않는다는 조롱이다.

사라 맥랜든은 텍사스 어느 지방신문을 대표하는 닉슨 킬러. 그녀는 언제나 볼펜 끝을 닉슨에게 들이대면서 질문이라기보다 공격을 퍼부었다.

유신 (維新) 체제하의 한국기자에게 그런 장면은 문화적인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CBS 방송국에는 래더가 대통령에게 범하는 무례를 항의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미국 사람들에게 래더는 미국의 대통령직 자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됐다.

맥랜든은 뉴욕 타임스 사설에서 엄한 꾸중을 들었다.

권위지가 남의 신문기자를 질책하는 사설을 쓴 것 자체가 전무후무한 일로 화제가 됐지만 여론은 전적으로 뉴욕 타임스의 사설에 동조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섹스 스캔들로 최대의 정치위기에 몰리고 있으면서도 그의 인기가 여전히 60%를 웃돌고,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조차 그를 탄핵할 자신이 없는 이유 - 그것은 바로 70년대에 닉슨에 대한 래더와 맥랜든의 거친 처신을 꾸짖은 미국의 전통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섹스 중독자 같다.

아칸소 주지사 시절부터 상습적으로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모니카 르윈스키 사건이라는 것도 너무 길었던 그의 여성편력의 꼬리가 밟힌 것에 불과하다.

클린턴에 관한 한 대통령의 도덕성은 따질 여지도 없다.

그는 다른 데도 아닌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세금 내는 국민의 것인 공공 (公共) 의 시간에 젊은 여성직원의 스커트 자락을 들치는 일에 탐닉했다.

그는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연방 대배심원들 앞에서 4시간 이상 증언을 했다.

그는 빛나는 머리와 변호사로 갈고 닦은 뛰어난 말재간으로 르윈스키와 '적절치 않은 관계' 를 가졌다고 고백하고, 국민과 아내에게 사과했다.

이 사건에서 미국은 두개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는 4천만달러의 예산을 쓰면서 대통령의 스캔들을 캐는 정치적인 얼굴이다.

이것은 11월 중간선거의 전초전이다.

민주당이 하원에서 11석만 더 얻으면 적어도 하원에서는 다수당이 된다.

그렇게 되면 게파트 민주당 원내총무가 하원의장이 돼 2000년 대통령선거에서 유력한 민주당 후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화당에 의한 사건 추적은 다음번 대선까지 시야에 두고 있다.

또 하나의 얼굴은 클린턴의 사생활은 가증스럽지만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도 미국 경제가 장기호황을 누리게 했으니 위증이니 탄핵이니 하고 더 이상 문제 삼을 것 없다는 여론의 관용이다.

대통령이 퇴임과 동시에 산사 (山寺) 와 형무소로 보내지고 청문회에 불려나갈까 불안해 하고, 그런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정치풍토와는 차원이 다르다.

여론은 클린턴의 증언과 대국민 사과를 수용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공화당과 언론은 불만이다.

클린턴의 말에 진실성이 없고, 사태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하면서도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클린턴의 도박은 절반의 성공만 거둔 것 같다.

그의 부정직으로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도덕적 권위는 추락하고, 11월 중간선거와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후보들이 적지 않은 정치적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사건의 미주알 고주알보다는 민주주의의 요람에서 '대통령 자리' 가 어떤 대접을 받는가, 정쟁 (政爭) 은 어떻게 하는가, 말재주로 국민을 오도하는 대통령은 퇴임 후의 위상이 얼마나 불안한가에 주목하고 싶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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