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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극한대결, 해법을 묻다 ①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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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사실적 관계’에 대한 존중이 우리 사회의 지적 풍토가 되길 바랐다. 그는 ‘자연스러운 포즈’로 사진을 찍자는 제안도 ‘사실적 장면’을 벗어난 의도적 연출로 여겨 꺼릴 정도였다. 이화여대 학술원 건물 앞에서 그를 설득해 사진을 찍었다. [구희언 인턴기자]


-요즘 상황이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과 비슷하다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과거는 어쩔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 아닌가요. 유럽에서도 독일·영국·프랑스는 늘 싸웠어요. 이제는 서로 협력하잖아요. 우리가 지금 해방 직후처럼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죠.”

- 그런데도 여와 야, 좌와 우가 왜 이리 극렬한 겁니까.

“집단적·개인적 이해관계의 대립이라고 봐야죠.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이해관계죠. 그것 자체를 탓할 수 없지만 사회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주장을 해야죠. 예를 들어 빈부격차를 줄이자는 주장은 사회주의 관점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점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정치인들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입니다.

“우리 사회에선 주장은 많은데 ‘사실적 관계’에 대한 인식은 굉장히 부족한 것 같아요. 뭔가 주장하려면 우선 현실적으로 대안이 가능한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를 타도하자는데 그럼 국민 모두가 받아들일 대안이 뭐죠? 조선은 ‘상소’가 많은 나라였습니다. 임금을 질타하는 문구를 보면 조선이 왕정체제였는지 의심이 들 정도예요. 저도 선비들의 기개와 서슴지 않고 얘기하는 문화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당성을 주장했으니까 그건 무조건 긍정적이라고 해선 안 됩니다. ‘임금, 바르게 하시오’라고 주장하는데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라는지는 없어요.”

-오늘날의 갈등에도 그런 명분적 전통의 영향이 남아 있군요.

“저는 지식인이 국민을 대표한다는 주장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지식인의 역할은 사실적 인과관계를 잘 따져서 ‘내 생각엔 이렇게 하는 게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 좋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겁니다. 훈련받은 능력에 따라 생각하고 연구해서 결과를 보여주는 거죠. 국민을 대표하는 게 아닙니다. 국민을 대표한다면 지식인이 나라를 통치하지 왜 정치인이 합니까?”

- 그래서 교수들의 최근 시국선언에 부정적이신가요.

“내 생각을 얘기할 수 있죠. 하지만 그게 국민의 의사라고 주장하는 건 지나칩니다. 저도 언론에 칼럼을 쓰고 의견을 내지만, 제가 어떻게 국민을 대표합니까? 다만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제 의견을 제시하는 거죠.”

-여야와 좌우가 상호 공존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념적으로 좌우의 구분이 없을 순 없겠죠. 하지만 좌에게든 우에게든 대상으로서의 현실은 하나입니다. 현실이 하나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엔 (좌우를 벗어난) 다른 대안이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싫든 좋든 좌우를 하나로 합치고 묶어서 그 안에서 해답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란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산층이 많아야 사회가 튼튼하다고 하는데 이념적으로 온건한 중도 성향의 국민이 많아질수록 사회가 건강해질까요.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안정성이 있다고 할 수 있죠. 사회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유지할 현실적 방안일 겁니다. 하지만 중산층이란 게 사회의 건강성과는 별개예요. 서양의 19~20세기 문학은 재산 늘리고, 출세하고, 사치품을 즐기는 속물 근성을 중산층으로 보기도 했어요. 안정성은 현실 긍정적인, 보수적인 생각인데 어찌 보면 사람 사는 데 가장 근본적인 거죠.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 자체가 보수적인 거 아닙니까?”

-철학적인 말씀 같은데 인간의 삶에서 안정성이 중요하다는 거군요.

“추상적으로는 죽는 게 좋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현실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기를, 더 잘 살길 바라고 그런 전제 아래서는 삶의 안정성이 중요할 수밖에 없지요. 전통적으로 정치를 잘하는 걸 ‘민생 안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중도세력의 존재와 폭은 얼마나 될까요?

“사실은 모두가 안정을 원한다고 할 수 있어요. 최근 비정규직 논란이 시끄러운데 월급을 잠깐 동안 많이 받고 끝나는 것보다는 적게 받아도 오래 다니길 바라거든요. 그런 게 사람들의 정서라고 할 수 있지요. 영국에선 노동자계급이 자기 집을 가장 보수적으로 꾸미려고 한답니다.”

-한국 사회에선 타협과 중도를 이야기하면 좌우 극단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기회주의자’나 ‘회색분자’로 몰아붙입니다.

“사실은 안정적인 삶이란 것 자체가 정치와의 거리를 말합니다. 행동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의 삶이 정치화해야 한다고 보지만, 보통 사람들은 안 그래요. 정치가 자꾸 사람의 삶을 흔들어 놓으니까 원칠 않죠. 농사꾼들이 임금이 누군지 모르는 게 태평성대라는 고사도 있잖아요. 중산층이 기회주의자여서가 아니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안정적인 삶 자체가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는 겁니다.”

- 그럼 결국은 목소리 큰 사람들에게 끌려다닐 텐데요.

“조선시대에도 1000명 정도의 지식인이 단합하면 국가가 흔들흔들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죠. 하지만 이들이 국민 전체의 의사를 대표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정치적 자산·식견이 있고 그걸 정책화해 낼 능력이 있더라도 그걸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으로 단정하지 않는 겸손함 말입니다. 우리 사회가 불안한 건 변화가 너무 큰 것도 또 다른 원인입니다. 모든 게 너무 빨리, 급격히 변하니 다들 불안감을 갖고 있어요. 그런 경험 때문에 지나치게 정치화돼 있어요.”

-언론계의 분열과 당파성도 논란입니다. 언론사가 특정의 정치적 견해와 신념을 갖고 보도하는 걸 어떻게 보시나요?

“학자들도 그렇고, 국민도 그렇고 ‘사실에 대한 존중’이 지적 풍토의 일부가 됐으면 해요. 언론도 사실 보도 자체에 만족해야 할 텐데 사실을 (자신의)도덕적 관점에서 해석해야만 시원한 것처럼 돼 있죠.”

-신문에는 오피니언 기능도 있지 않나요.

“오피니언도 당위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사실 보도의 전체적인 연관을 밝혀주라는 거죠. 독자가 판단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오피니언인데 꼭 어떤 도덕적 주장을 펴야 하는 걸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때도 당위적 주장들이 많이 나왔었죠.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촛불시위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부가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국민 의사를 표현하는 부분이죠. 국민 전체의 의사가 아니더라도 그런 우려를 전달할 순 있어요.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건 결국 시위대가 아니라 국가가 하는 거죠.”

-결국 결정은 제도권의 틀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건가요.

“네. 그러려면 국회나 정부가 정상적인 상태에 있어야죠. 지금은 국회가 논의를 다 포기한 상태여서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죠.”

-직접 민주주의를 신뢰하지 않으시는군요.

“직접 민주주의는 항의는 할 수 있지만 정책을 만들 순 없어요. ‘노’라고 하는 건 직접 민주주의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럼 어떤 대안을 내놓을지,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등의 적극적인 일은 할 수 없는 거죠.”

-급진적인 해결책을 안 믿는 것 같습니다.

“합리성에 입각하라는 거죠. 합리성은 우리가 목표로 하는 걸 지속적인 현실이 되게 만드는 겁니다. 합리성은 될 수 있으면 평화적이어야 하지만 평화적인 수단을 넘어가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상적인 목표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죠. 계속적인 노력이 저절로 움직여지게 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필요하고요. 뭔가를 고친다고 할 때 어떤 때는 혁명적 계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합리적인 현실이 되려면 법과 제도가 있어야 하는 거죠.”

-한국 사회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독일 같은 데서 이야기하는 ‘사회적 시장 체제’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되, 부작용들을 국가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해결한다는 거죠.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어떻게 복지체제를 갖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만드냐는 거죠.”

대담=김종혁 문화스포츠 에디터
정리=배노필 기자 , 사진=구희언 인턴기자

◆김우창 교수=1937년 전남 함평 출생.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문명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교수를 거쳐 고려대 영문과 교수, 고려대 대학원장을 지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고 현재 이화여대 석좌교수. 지난해 서울에서 첫 대회를 연 ‘한·중·일 동아시아 문학포럼’의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 『심미적 이성의 탐구』 『시대의 흐름에 서서』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 『정의와 정의의 조건』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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