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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이버 습격사건, 징비의 교훈은 살아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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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아아, 임진왜란의 재앙은 참혹하였다. 열흘 사이에 삼도가 방어선을 잃고 팔방으로 와해됐으며, 임금의 수레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후회와 한탄으로 가득 차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돌아온 사신 황윤길·김성일이 전쟁 징후를 서로 다르게 보고한 것, 그 때문에 조정이 둘로 나뉜 것, 결국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전란을 맞은 것들이 기록돼 있다.

임금한테 ‘병화가 없다’고 보고한 김성일에게 유성룡이 ‘진짜 그러한가’라고 파고 물었더니 김성일은 이렇게 답했다. “나 역시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황윤길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안팎이 놀라고 의심할까 봐 그리 해명했습니다.”

김성일은 ‘눈으로 본 일본’을 보고하지 않았다. 그저 ‘황윤길의 생각’에 대해 논했을 뿐이었다. 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파장만 의식했다. 서인에게 정황판단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동인의 정파적 고려도 작용했다. 결국 2년 뒤 전란이 터졌고 김성일은 속죄하듯 일선에서 전사했다.

7·7 사이버 국가습격 사건 앞에서 정치권은 ‘징비’의 교훈을 외면하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번 사건의 사실보다는 정황판단의 주도권 잡기에 더 관심 있어 보인다. 사이버 공간은 하나의 영토다. 사흘 사이에 청와대, 국방부의 방어망이 와해됐다. 한국이 공격당한 것이다. 미사일이 발사되고, 서해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해외에 나간 국민이 테러를 당해야만 한국이 공격당하는 것이 아니다.

위와 같은 대한민국 공격 사건이 발생했을 때 ①피해 규모가 얼마인지 ②어떤 경로로 공격이 진행됐는지 ③어떻게 반격(수습)할 건지 ④누가 공격했는지를 동시에 신속하게 점검하는 건 정부의 최우선적 임무다. 국가정보기관이 이 과정에서 첩보 수준이라 할지라도 공격 의심세력을 지목하는 건 자연스럽다. 공격 의심세력이 북한이라고 해서 그걸 숨겨야 할 이유가 없다. 그건 민주당이 집권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민주당이 사건의 배후로 북한이 지목되는 것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민주당 대변인은 “하다 하다 사이버 북풍까지 만들어 내려는가. 가뜩이나 얼어붙은 남북관계 상황에서 정부가 할 일인가”라고 발표했다. 눈앞의 국가 공격 상황보다 북한의 ‘억울한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겠다는 모양새다. 국정원이 11일 북한의 소행인지 정밀 추적하고 있다고 발표했는데 이게 사실로 확인된다면 그때는 어찌할 것인가. 김성일은 전선에 뛰어들어 잘못을 속죄했지만 민주당은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징비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막는다’는 뜻이다. 적을 엄격하게 보지 못하고 상황판단에 정파적 고려가 개입되자 왜란은 벌써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왜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징비의 교훈은 지금도 살아 있다. 사이버 습격에서 징비의 교훈을 얻지 못하면 더 큰 참화를 막지 못할 것이다. 한국에 필요한 건 말싸움이 아니라 난(亂)을 대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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