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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화 속의 한·중·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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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프랑스에서는 외국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프랑스말로 내보낸다. 자국어 보호를 위해서다. 그런데 요즘은 포켓몬스터 등 일본 애니메이션 주제가가 일본말로 나온다. 인터넷에 나오는 일본어 주제곡이 인기 있다 보니 슬그머니 그렇게 됐다. 초등학교에서는 일본 만화 주제가를 흥얼거리는 아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대형 서점 버진의 3층은 절반 이상이 일본 만화로 채워져 있다. ‘나루토’ 등 인기 작품은 나오기 무섭게 품절된다. 2층의 일본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코너에도 일본이라면 무조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일본 매니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금은 이들이 2만원짜리 일본 영화 DVD를 사지만 수십 년 뒤에는 수백만 배 더 비싼 일본 상품의 구매 계약서에 사인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도 빠지지 않는다. 파리의 주요 음반 매장에서 클래식 부문 베스트셀러는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의 음반이다. 며칠 전 클래식 CD를 할인판매하는 곳에 가보니 랑랑의 베토벤·쇼팽·라흐마니노프 연주곡이 모두 동이 나 있었다.

최근 일간지 르 피가로는 프랑스 미술 애호가들을 상대로 최고의 현대미술 작가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여기서 중국의 얀페이밍이 10% 넘는 지지를 얻으며 3위에 올랐다. 얀페이밍과 프랑스의 인연도 작용했겠지만 영국·미국·프랑스의 쟁쟁한 작가들을 제쳤다는 게 놀라웠다.

유럽에서 일본·중국 문화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 데는 그들 정부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일본은 30여 년 전부터 유럽의 문화·교육계 관계자들을 수백 명씩 초청해 자기들 문화를 소개했다. 또 유럽 각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과 게임의 홍보 전시를 꾸준히 지원했다. 중국 정부는 반대로 자국의 우수한 예술가를 대거 유럽으로, 미국으로 내보내 공부시켰다. 그렇게 20여 년이 지나면서 중국 예술가들은 지금 유럽의 무대와 전시회장에서 서양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이에 비하면 우리 정부의 한국 문화 알리기는 관심도 부족하고 일관성도 없어 보인다. 공직사회 슬림화 하면 해외 문화·홍보직부터 줄이는 게 공식이다. 해외에 한국 문화센터를 짓는다고 하다가도 살림이 어려우면 보류 대상 1순위에 오른다. 문화센터는 고사하고 해외 한국 문화원들은 우리 예술인의 해외 공연이나 전시를 돕고 싶어도 돈도, 일손도 턱없이 달리는 형편이다.

수십 년째 남의 건물 지하실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파리의 한국 문화원 앞을 지나다 대궐 같은 새 건물로 이전한 중국 문화원과 10여 년째 파리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초현대식 일본 문화원이 떠올랐다. 유럽 속에서 우리와 중국·일본 문화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답답했다.

전진배 파리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