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인생] 화랑들이 연마하던 선무의 정통 계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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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풀선사가 삼성궁에서 ‘선무’를 선보이고 있다. 송봉근 기자

▶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삼성궁. 솟대와 다양한 장승이 설치되어 있다.

지리산의 삼신봉(해발 1284m) 아래에는 최치원과 도선국사가 천하제일의 명지(名地)로 지목한 청학동(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이 있다.

이곳에는 은둔생활을 하며 수련을 하는 숱한 도인과 기인들이 있다.

청학동 기인 중 한 명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삼성궁의 한풀선사(41.속명 강민주).

그가 우리의 전통무예의 하나인 산중무예의 맥을 잇는 중심 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 전통무예는 국방을 위한 관 중심의 군무(軍武), 남사당이나 평민들의 놀이문화로 전해 온 택견, 신선도를 따르며 산에서 수련을 하던 선도(仙道) 문중에서 이어 온 산중무예 등 세 가지로 대별된다.

한풀은 조선시대까지 실존인물이 확인되는 산중 무예의 하나인 선무(仙武)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오전에는 고서를 탐독하고 오후에는 행선(行仙.몸으로 하는 수련)의 하나로 돌탑 쌓기를 하고, 외부 노출을 꺼리는 습관 때문이었다.

10여 차례 시도 끝에 25일 밤늦은 시간에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광채 나는 눈빛에 기다란 수염,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과 황토빛 도복 차림의 그를 보노라면 금방이라도 검을 휘두르며 하늘로 솟아오를 것 같다. 그는 "삼국시대 신라 화랑들이 수련하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선무의 정통 계승자"라고 소개했다.

선무는 호흡을 통해 축적된 내공으로 하는 기무(氣武), 보여 주기 위한 예무(藝武), 실전에 사용하기 위한 군무(軍武)등 세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그는 모든 선무에 정통하지만 주로 기무 수련에 열중하고 있다.

"예무와 군무는 요즘 활용할 일이 거의 없지만 기무는 정신수련에 좋다"고 설명했다.

선무는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스승이 제자의 동작을 직접 지도하는 식으로 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도 스승인 낙천(樂天) 선사(1902~84)에게서 배웠다.

그의 선무 계보는 낙천선사→한빛선사(1860~1945)→공공진인(空空眞人,1807~1910)→만덕진인(萬德眞人,1743~1840) 등으로 연결된다.

한빛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서일장군(1881~1921) 부대에서 활동하다 노년에 지리산을 찾아 낙천을 제자로 삼고 수련을 했다.

현재 삼성궁에는 공공진인으로부터 물려 받았다는 능운검 등 세 자루의 보검이 보관돼 있다.

그는 활.철퇴.창.검을 다루는 방법과 마상(馬上)무술 등 24가지 무예에 능통하다.

말을 달리며 검을 휘둘러 쉽게 짚단을 서너 동강 낸다.

허공을 날며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무술영화 장면같다.

해마다 10월 중순 삼성궁에서 지내는 천제때 공개하는 그의 무예를 보고 탄성을 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는 대학을 마친 87년부터 삼성궁을 만들며 선무를 보급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의 문하에 들어와 10여 년의 수련과정을 거쳐 배출된 정통제자는 30여명 뿐이다. 수련 과정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중도에 그만 두는 사람이 많다.

일반 보급과정인 여름.겨울방학 동안 열리는 배달민족학교에서 선무의 기초과정을 배워 나간 사람은 3000여명에 이른다.

하동군 금남면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리산에서 수련 중인 스승을 찾아 틈틈이 무예를 배웠다. 아버지가 친구인 낙천에게 아들을 지도해 달라고 맡겼기 때문이다.

방학 때는 지리산에서 살면서 무예를 배웠다. 그렇다고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한의사여서 가정형편이 넉넉해 중3학년때 서울로 유학가 대학까지 마쳤다. 대학시절에는 대학 대표 검도선수로 나갈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그는 요즘 10여 명의 수련생들과 선무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스승으로부터 배운 동작을 조선 정조 때 종합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와 대조하면서 체계화하는 일이다. 무예도보통지는 당시 전해오는 무예를 왕명에 의해 집대성한 책이어서 선무와 비슷한 동작이 많이 포함돼 있다. 그는 선무 보급과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대안 대학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를 지지하는 대학교수 등이 주축이 돼 내년 초 개교할 계획이다. 그는 "요즘 교육은 너무 문(文)에 치우쳐 균형을 잃고 있다"며 "조상들이 수련해 온 산중 무예를 배운다면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김상진 기자 <daedan@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 환인.환웅.단군 개국 시조 모셔

◆ 삼성궁=청학동 터골 8만여 평에 자리 잡고 있다. 환인.환웅.단군 등 3명의 개국 시조를 모시고 있다. 한풀선사는 "'민족혼을 샘솟게 하는 우물을 파거라'는 스승(낙천)의 가르침을 받들기 위해 삼성궁을 세웠다"며 "앞으로 역대 나라를 세운 인물과 각 성씨의 시조를 모시는 성역으로 가꿀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풀은 24살 때인 1987년부터 제자들과 솟대를 쌓고 건물을 지어 94년 10월 3일 개천절에 시설을 개방했다. 수 천 개의 솟대와 돌탑, 조선시대 국왕 호위기관인 무예청을 상징하는 한옥과 개국 시조 등을 모신 전각 등 10여 채의 한옥으로 이뤄져 있다.

한풀과 제자들이 하루에 흙과 돌을 60t이상 들어 옮긴다는 수련원칙을 7년 동안 지키면서 일궈낸 솟대와 돌탑들이 장관이다. 이곳의 수행자들은 오전에는 토굴에서 감정을 다스리고,호흡을 고르면서 욕심을 버리는 세 가지 수행(三法修行)을 한다.

이 수행은 기쁨, 두려움, 슬픔 등을 피하고 명상과 호흡을 통해 기를 채우면서 자극적인 냄새, 소리, 맛 등을 멀리하는 방법이다.

오후에는 무예를 수련하거나 솟대를 쌓으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이곳에선 음력 3월 16일과 10월 중순 조상들이 하늘에 지내 온 제사인 천제(天祭)를 모신다. 3년 전 금융기관 대출금을 갚지 못해 어려움을 겪자 하동군이 빚을 대신 갚아준 뒤 공동 소유를 하게 됐다. 운영은 삼성궁이 계속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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