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위험하다]10.끝 방송·신문의 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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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그를 보내는 세상의 인심은 참으로 각박했다.

빈소가 차려진 영안실은 낯익은 영화인의 모습만 띄엄띄엄 보였을 뿐 조촐하기 그지 없었다. 신문이나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부고 (訃告) 를 전하긴 했지만 대부분 한 때 유명했던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단순 사실을 전달하는 정도 이상은 아니었다. "

얼마전 원로 영화배우 김진규씨가 타계했을 때, 영화평론가 조희문교수 (상명대) 는 한국 매스컴이 '떠나는 스타' 에 대한 예우에 너무 박정 (薄情) 하다며 이같이 한탄했다.

그는 프랭크 시내트라가 세상을 떴을 때 미국 언론이나 팬들이 보여준 열띤 추도분위기, 이브 몽탕의 별세 소식을 접한 프랑스 신문이 연일 그를 기리는 기사로 지면을 채우고 방송은 그가 출연했거나 불렀던 영화및 노래를 내보냈던 예를 상기시켰다.

프랑스 문화에서 이브 몽탕이 차지했던 만큼의 무게를 고 김진규선생에게서 찾을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매체들이 현재에만 매몰 된 채 과거를 잊어버리는 일종의 '망각증' 에 빠져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이건 결국 거시적인 안목으로 문화를 보지 못하고 눈 앞의 화제성 기사만 쫓아다니는 우리 미디어의 '현상 추수주의' 와 관계가 깊다.

김창남교수 (성공회대) 는 최근의 '서태지 새 음반 발매' 와 관련된 기사들에서도 이런 면이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서태지가 2년여만에 신보를 발표했다는 것 자체가 뉴스거리니 다루는 건 좋으나 접근 방식에서 좀 더 분석적으로 될 필요가 있었다" 며 "90년대 대중문화의 전후 맥락 속에서 그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띠며, 그런 상황 속에서 새 음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짚어줬어야 했다. " 고 주장했다.

단순히 음반이 몇장 예매되고 통신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다는 등 수동적으로 여론에 떠밀려 다님으로써 결과적으로 음반사나 기획사의 상업적인 전략에 말려들고 10대들의 소비만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현상 추수주의' 가 신문들이 빠져있는 증후군이라면, 대중들의 기호에만 영합하는 '대중 추수주의' 는 공중파 TV방송에서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다.

시청률이 프로그램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고급문화나 문화현상을 진지하게 다룬 기획물이 눈치만 보다 말석 (새벽이나 심야시간대) 으로 밀려나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말석은 커녕 아예 자리를 못 얻는 경우가 다반사다.

지난해 KBS가 기획프로그램으로 내놓았던 '문화탐험 오늘' 은 '백댄서의 세계' '한국영화의 현주소' 등 문화 현상의 이면을 깊이 있게 짚어 안목 높은 시청자들의 인기를 끌었으나 단지 시청률이 낮다는 이유로 7회만을 내보낸 후 카메라를 접어야 했다.

또 현재 출판시장은 도매상들의 잇단 부도와 그 여파로 출판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등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데도 신간이나 양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출판시장을 회생시키는데 일조해야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공중파 채널은 거의 없다.

이처럼 '참을 수 없이 가벼운' TV프로그램의 경박성의 예를 대자면 수없이 많다.

원용진 교수 (서강대 대우교수.신문방송학) 는 우리나라 미디어문화를 '목적없는 방랑아' 에 비유한다. 좌표를 설정하지 못한 채 이념도 지식도 방법론도 없이 총체적으로 고장난 시스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결을 기름지게 하는 것" 으로 규정하면서 "시청률 경쟁이나 반짝 세일같은 한탕주의에 몰두하는 한 항상 소재주의에 시달릴 뿐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 이라고 강조했다.

김창남교수도 "문화를 엔터테인먼트 개념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며 "좋은 문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데 신문과 방송이 앞장서야한다" 고 주문했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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