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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짜리 김밥 끼니… 박봉이지만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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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400만명에 육박한 신용불량자는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2300만명)의 17%에 이른다. 신용불량자들에게 채무상환의 길을 연 배드뱅크(한마음금융)는 최근 '나의 신용불량 탈출기'를 공모했다.

◆사례1=미국 명문대 재학생이었던 정모(25)씨는 1999년 한국에서 벤처창업 바람이 불자 휴학계를 내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학업을 중단하고 도전한 창업이었지만 2000년 봄 코스닥시장의 대폭락으로 투자 유치에 실패하고 5개월 만에 폐업 위기에 몰렸다. 자금 조달이 어려웠을 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이 길거리 카드였다.

"갓 21세로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나이였고 거래 실적도 없어 발급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길거리에서 발급받은 카드 한도는 무려 1000만원으로 책정됐습니다."

일단 운용자금으로 숨통을 틔우자 사업자금이 필요했고 카드는 2년 만에 무려 6장으로 늘어났다. 결국 탈이 난 것은 2002년 5월부터 길거리 모집이 규제되면서였다.

"카드 한도가 통합되면서 돌려막기가 불가능하게 됐고 추심의 강도가 심해졌습니다. 일용직을 전전해 봤지만 의욕만으로 빚더미에서 탈출할 수 없었죠. 희망이 없어지자 강릉으로 내려가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 순간까지 카드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죽어서도 카드빚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은 그는 5월에 문을 연 배드뱅크에 가입해 8년간 빚을 갚기로 했다. 정씨는 현재 한 IT기업에 수습사원으로 취직해 인생 재기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사례2=어릴 적부터 절약 습관이 몸에 밴 알뜰 살림꾼인 주부 최모(29)씨가 신용불량자의 굴레에 빠져든 것은 외환위기 직후였다. 건축업을 하는 남편의 일감이 줄어들자 자신도 조그마한 회사의 경리로 취직한 최씨는 사은품에 이끌려 카드와 인연을 맺게 됐다.

"마침 취업은 했지만 직장 경력이 없어도 가입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참 신기했어요. 그땐 교통비도 아까워 걸어다니곤 했지만, 시부모님에게 맡긴 아이를 위해 비상금으로 요긴하게 쓸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하고 사회 분위기에도 활력이 돌면서 최씨의 씀씀이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위기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썼던 카드 이용 대금이 2000만원으로 불어났을 무렵 찾아왔다. 경기침체로 직장까지 그만두게 된 최씨는 추심원들과의 숨바꼭질로 살이 6~7㎏이나 빠졌고, 카드빚 때문에 남편과 이혼했다.

"수면제 80알을 소주 한병과 함께 먹고 자살을 기도했지만 가족들에게 발견돼 이틀 만에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났다는 기쁨보다 지긋지긋한 빚 독촉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가 더 걱정됐습니다."

최씨는 6일 배드뱅크에 가입해 8년간의 긴 신용회복 절차에 들어갔다. 일자리를 유지해야 빚 상환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최씨는 요즘 1000원짜리 김밥 한줄로 배를 채우는 박봉에도 신바람이 난다고 말했다.

◆사례3=이모(28)씨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돌아온 것은 2000년 봄, 길거리 카드 모집이 전국을 휩쓸던 때였다. 이씨도 다른 대학생들처럼 길거리에서 카드를 발급받아 극장 요금도 할인받고 여자친구 선물도 샀다.

이미 한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번째부터는 쉽게 카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씨는 이것이 돌려막기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S카드 결제일 25일, Y카드 1일, L카드 11일, K카드 15일, 론카드 16일…. 한 계좌에 결제일을 통합하고 인터넷뱅킹을 이용하면 마우스클릭 한번으로 연체 없이 완벽한 돌려막기가 가능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운영하던 식당이 어려워지면서 이씨의 완벽한 돌려막기에 제동이 걸렸다.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까지 돕게 된 이씨는 이른바 '카드깡'(이자를 미리 내고 현금서비스를 받는 방법)에 나서게 됐고 이씨는 이 때문에 순식간에 3000만원의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공사장에서 막일도 해봤지만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자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결국 해결책은 못됐다.

최씨는 현재 3000만원을 8년간 분할 상환하는 배드뱅크 신용구제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다. 최씨는 "이제 희망은 일자리를 구해 빚을 상환하는 것인데, 신불자 경력 때문에 취업하기가 어렵다"며 "더욱 실질적인 신용구제 정책이 아쉽다"고 말했다.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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