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한철규에게는 또 다른 구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상로 (商路) 개척이었다. 영월에서 595번 지방도로를 타고 남으로 내려가면, 유명한 고씨동굴과 만난다.

그곳에서 역시 동쪽으로 개설된 998번 도로를 타고 하동면쪽으로 가다 보면, 부석사를 거쳐 경상북도인 봉화군 경내와 마주친다.

강원도 남쪽에서 경상 북부내륙과 연결되는 유일한 물류소통도로라 할 수 있는 이 길은 그러나 무구치를 중심으로 하는 약 8㎞에 이르는 구간이 지금 한창 확장공사중이었다.

그러나 확장공사가 없었던 시절에도 이 도로의 이용률은 보잘 것이 없었다.

끽해야 주말에 청량산을 찾는 등산객들이나, 부석사를 찾는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한산한 산간도로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연도의 짙푸른 수림과 오염되지 않은 청정계곡과 어우러진 절경은 와석의 옥동강을 만나면서 회암령, 선달산, 박달령을 지나고 부석사에 이르기까지 사뭇 계속되었다.

강원도 내륙장시의 매상이 신통치 못할 경우, 이 도로를 넘나들면서 경상도 북부내륙 지방의 매상을 노려볼 만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구상단계일 뿐이었다.

그들이 영월 덕포장터에 도착한 것은 오전 8시를 채 넘기지 못한 이른 시각이었다. 일찍 도착한 축들은 짬을 내어 해장국집에서 한 시간쯤 쪽잠으로 피곤을 달래도 좋을 시간이었다.

영월 덕포장은 그 모양새가 강원도 내륙에 위치한 오일장중에서도 길이가 가장 길기로 유명한 장시였다.

영월대교가 끝나는 서쪽에서부터 영월역 앞인 동쪽까지의 이면도로를 꽉 채우며 들어선 길다란 장시였다.

한씨네 행중은 서쪽과 동쪽의 들머리길 두 군데에 좌판을 펴기로 하였다.

동쪽의 좌판은 변씨와 태호가 맡기로 하고, 서쪽 들머리에는 철규가 좌판을 벌이기로 하였다.

한 장터에서 두 군데다 좌판을 벌이기로 한 것은 물론 철규의 생각이었지만, 오전중에는 별다른 매기가 없다가, 낮 12시쯤 열대여섯살로 보이는 숫처녀 하나가 우연히 나타나 마수거리를 하고부터 재수가 터져 황태를 찾는 고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예상치도 않았던 매상이 있었다.

마침 동강의 어라연을 찾아온 관광객들이 장구경을 한답시고 역전에다 버스를 정차하는 모습이 먼발치로 바라보였다.

때를 같이하여 태호가 핸드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흩어져서 장구경을 해야 할 관광객들이 한둘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한씨네 좌판을 둘러싸고 껄떡껄떡 넘어가는 태호의 나간다타령에 귀를 기울였다.

영월장터에서 발 뒤축을 굴러가며 장타령을 부르고 있는 좌판은 한씨네 황태전이 유일했다.

두 사람으로선 감당을 못할 만큼 너도나도 앞다투어 주문이었다.

계집애처럼 곱상하게 생긴 청년의 장타령이 구성졌고, 늙은 곰 같이 생긴 구레나룻 사내는 황태 포장하기 바빠 오줌 눌 사이도 없었다.

에누리를 하자는 축들에게는 한정판매이기 때문에 더 이상은 팔 물량이 없다고 거절해버렸다. 그 한마디에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사람 차별대우하느냐는 항의가 빗발쳤다.

시골장터 행상꾼이 한정판매를 한다는 소리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 듣는 말이라고 삿대질하며 대들었다.

영월은 시골이 아니라고 눈을 부라리자, 그건 옳은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나 주문한 황태는 내놓으라고 으름장이었다.

에프킬라시대이기 때문에 별도리가 없다고 얼토당토 않은 말로 둘러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올 여름에 아무리 모기떼들이 극성을 피운다 하지만 모기하고 황태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입에 침을 튀겼다.

결국은 잡기장에 주문량을 받아 적고, 북평에서 판매할 수량을 할애해서 버스까지 배달해 주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복잡해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기왕에 적당량을 구입했던 축들이 덩달아 배달주문을 따내겠다고 또 다시 아귀다툼을 벌였다.

한정판매라는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그들의 구매욕을 폭발적으로 자극한 것이었다.

철규의 좌판에서 잔량을 수거하여 버스에 배달까지 마감한 것은 오후 5시 무렵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