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진의 문화보기]다양성이 힘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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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절규' 를 그린 노르웨이 화가 뭉크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 가서 후기 인상파 작가인 고갱.세잔의 색채와 만났고,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베를린 분리파의 역동적인 선이 얼마나 인간의 무의식을 자극하는지를 발견했다.

그의 화폭에 담긴 죽음과 두려움으로 얼룩진 문학적 신비 외에, 동향인이었던 세계적 극작가 입센의 '유령들과 헤다 가블러' 의 무대 디자인을 직접 담당하게 된 것도 그의 행운에 한 몫을 기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뭉크를 20세기 미술사에서 독특한 지위로 부각시킨 것은 황혼이 축축하게 깔린 스칸디나비아 반도 특유의 감수성이었다.

어디 뭉크뿐이겠는가. 굳이 프로이드의 예술철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예술가를 키우기 위해 고향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양분이며 원동력이었음을 미술사는 증명하고 있다.

젊은 나이에 파리에 입성한 피카소의 황소는 스페인의 투우가 담겨 있으며, 미국의 대표적인 색면화가로 알려진 마크 로스코의 몽롱한 색채 속에는 러시아 평원의 향수가 꿈틀거린다.

그렇다면 우리 것은 뭘까. 과연 한국적 이미지란 무엇일까. 인사동 한구석, 화가들끼리 모여 얼큰하게 한 잔 걸친 자리에서 가끔씩 화두처럼 떠오르는 주제다. 그러나 '한국적' 이란 단어의 의미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샤머니즘 장단에 어깨를 추스르자니 선죽교 위에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하며 읊조리던 정몽주의 고매한 선비정신이 심금을 울리고, 하얀 무명치마 모시 적삼 단아한 버선코를 논하자니 현란한 단청무늬 박생광의 채색이 목에 걸린다.

효소처럼 발효된 장독문화 한편에서 고고한 평상심을 찾아 훌훌 떠나가는 구도자들, 그들의 등 뒤에 '한국적' 이란 단어가 가물거린다.

그렇다면 한국적 이미지란 결코 손에 잡을 수 없는 뜬구름이란 말인가.

아니다. 한국적 이미지는 그 어떤 색깔이나 형상과 같은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내용의 차원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각 지방의 서로 다른 맛을 내는 김치, 이 좁은 땅에서 그토록 다양하게 사용되는 사투리, 전통문화에서부터 오렌지 문화에 이르기까지, 그 이면에는 다양성이라는 공통분모가 발견된다.

그러나 애석한 일이다. 급격한 산업주의와 군사정권을 거치는 동안 우리 문화 전통은 피폐되었다. 초가 지붕을 한꺼번에 걷어치운 새마을 운동은 산업화를 일궈냈지만, 한국인 특유의 다양한 개성, 인성과 물성이 함께하는 지혜, 작은 것들이 큰 것을 이루는 '이소성대 (以小成大)' 등은 무분별한 개발과 평준화 논리에 밀려 무시되었다.

지금 같은 정치적 상황에서 지방색을 강조하는 것은 자다가 벼락맞을 일이겠지만, 궁극적으로 이 땅을 지켜온 것은 강한 지방색과 함께 공존해 온 다양한 문화 특유의 탄력성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양성은 우리의 과거였으며 동시에 창의력과 무형의 자산이 중시되는 정보사회에서 우리의 미래를 열어갈 원천이다.

눈앞에 다가온 글로벌 표준 시대에서 지역문화는 문화적 표현의 한 양태로 각광받고 있음을 기억하자. 다양성이야말로 우리의 힘이다.<끝>

김미진 (화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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