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칼럼]경제위기와 일본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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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필자는 지난 1월12일자 칼럼에서 아시아 금융위기와 관련해 앞으로 예상되는 문제로 중국의 통화 평가절하 가능성과 일본경제의 구조개혁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국제적 컨센서스를 구축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중국은 위안화의 환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개혁을 단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대 (對) 일본 불신은 드디어 엔화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엔화 하락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분명했다.

중국정부는 일본 엔화가치가 계속 절하되는 경우 위안화의 평가절하가 불가피하다고 미국과 일본을 향해 경고했다.

중국의 경고는 주효했다. 미국과 일본은 공동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함으로써 일단 엔화의 급격한 절하를 막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엔화 절하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이 빠른 시일 내에 효과적인 개혁조치를 취하지 못한다면 엔화가치는 또다시 무너질 것이 틀림없다. 일본 엔화가치가 지나치게 떨어지는 경우 가장 큰 타격을 받을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

한국은 수출상품들이 거의 다 일본 제품과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 엔화 절하는 우리 제품의 가격경쟁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엔화가치가 안정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엔화의 안정을 위해서는 일본정부가 금융을 포함한 일본 경제의 구조개혁을 단행해야 하는데 일본이 그렇게 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미국도 일본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일본을 설득할 수 있을까. 오히려 한국정부가 말을 잘못하게 되면 국제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되든가 일본사람들의 반감만 사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중국이 미국과 일본에 엔화하락을 막으라고 경고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경고를 무시할 경우 위안화 절하를 단행하겠다는 위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언론보도에 의하면 루빈 미국 재무장관은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장개입할 의사가 없었다고 한다.

시장개입을 하기로 한 결정은 클린턴 대통령이 중국 방문중에 중국이 위안화 절하를 결정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미국 안에서 논란의 대상이 돼 있는 자신의 중국방문이 실패작으로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단 시장개입이라는 극약이라도 쓰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원래 루빈 재무장관은 엔화의 하락을 통해 일본정부가 강도높은 개혁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충격을 가하려 했던 것 같다.

경제원리로 보더라도 미국은 경기가 너무 뜨거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자율을 상향조정해야 할 형편이므로 달러는 계속 강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고 일본은 내수를 자극하기 위해서라도 이자를 더 하향조정하는 경우 엔화는 약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 재무부는 엔화 하락을 인위적으로 방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환율문제는 경제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문제도 된다.

엔화의 하락은 아시아 전지역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인식이 지배하는 한 미국은 이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은 미국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 경제위기는 궁극적으로 정치적 도전이다.

거의 반세기에 걸친 냉전시대를 통해 이 지역 국가들은 군사안보를 위해 엄청난 자원을 전쟁준비에 투입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 닥쳐온 위협은 전쟁이 아니라 외환위기였다.

아시아는 지금 안정된 환율의 붕괴로 대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시아지역의 안정을 파괴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위협은 일본 경제다.

냉전시대의 위협이 소련과 중국이었다면 지금은 일본이 가장 큰 위협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국은 일본을 협박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카드가 없다.

그렇다고 사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정한다고 일본지도층이 한국이 불쌍해 그들의 이익과 반하는 선택을 할리도 만무하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일본의 친구 입장에서 일본경제의 개혁이 왜 일본에 유익한가 하는 점을 조용히 설득해 보는 일이다.

물론 이런 설득노력이 효과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일본지도층의 믿음을 살 수 있도록 오랫동안 일본의 친구 역할을 자처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제는 우리의 대일 (對日) 관계도 감정의 차원을 넘어 현실에 바탕을 둬야 한다.

왜냐하면 아시아 경제위기가 보여주듯이 우리 경제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일본 경제와 상호의존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경원<사회과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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