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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문화] 악기의 왕, 런던 여름밤 수놓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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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한시간 반 동안 여덟 곡을 연주하는 파이프오르간 공연이 끝난 뒤 청중들이 웨스터민스터 사원을 나서고 있다. 해가 긴 여름이라 영국인들은 이때쯤부터 저녁 식사를 시작한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영국 런던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관광 1번지다. 왕과 왕비가 취임하는 대관식장이자 사후 영면하는 묘지로 가장 중요한 성당이라는 상징성 덕분이다. 13세기 고딕 양식의 웅장한 건물 자체도 훌륭한 볼거리다. 그래서 낮엔 종일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관광객이 뜸해진 20일 오후 6시30분 사원엔 런던 시민들이 조용히 모여들었다. 서두르는 발걸음도, 들뜬 목소리도 없다. 사원을 관리하는 마셜(Marshal)이 검붉은 망토를 두르고 나와 철문을 열자 한 줄로 늘어서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입장료는 10파운드(약 2만원).

본당 안으로 들어서자 황금색 치장을 한 31m 높이의 아치형 천장이 압도한다. 십자 모양으로 이어져 화려하면서도 경건하다. 본당 예배용 벤치와 낡은 보조의자, 그리고 성가대석까지 500여명의 청중이 가득 들어찼다. 바로 옆 국회의사당의 빅벤이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사그라질 즈음 웅장한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종소리를 이어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여름 정기 파이프오르간 축제' 두 번째 행사가 시작됐다.

이날은 영국 최고 교회음악 전문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존 스콧(49)이 뉴욕 5번가 성 토머스 교회 음악감독으로 초빙받아 떠나기에 앞서 고국에서 펼치는 송별 리사이틀이다. 축제는 7, 8월 두달간 여섯차례 공연으로 이어진다.

'악기의 왕'이라는 파이프오르간, 영국 최고의 성당, 그리고 절정기 오르가니스트의 손끝을 탄 석별의 정은 잘 어울렸다. 마이클 버컬리의 '와일드 벨스(Wild Bells)'라는 현대음악이 첫 곡으로 뽑힌 것은 대형 석조건물에 어울리는 파이프오르간의 맛을 가장 잘 살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원의 파이프오르간은 1937년 조지 4세 왕의 대관식에 맞춰 새로 만든 것이다.

작은 종소리처럼 가늘고 높은 음이 멀리서 아련하게 들리다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굵은 파이프는 큰 종의 묵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각각의 파이프가 나름대로 웅장한 종소리를 점점 크게 내면서 홀 전체가 쩌렁쩌렁하다. 파이프들이 크게 함께 울리고 사라진 뒤에도 잔향은 성당 구석구석을 한참 휘감고 돌았다. 관객들은 숙연해졌다. 눈을 지그시 감거나 십자가 문양을 응시하며 경청하다 잔향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어진 헨델의 콘체르토(Concerto in G)는 부드럽게 물결치듯 끊어지다 이어졌다. 파이프오르간과 바로크 음악의 어울림은 적격이다. 더욱이 '음악의 어머니'는 바로 이곳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혀 있다. 25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덟곡을 듣는 데 모두 90분의 시간이 흘렀다. 파이프 사이에 묻혀 연주했던 존 스콧이 비로소 얼굴을 보였다. 영국인으로는 작은 체구에 금발의 미소가 동안이다.

성가대석을 중심으로 앞뒤로 나뉜 벤치를 찾아 일일이 인사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지만 앙코르는 없었다. 여름 해가 길기 때문에 바깥은 아직 환했고, 차와 사람이 뒤엉킨 풍경도 여전했다. 어둡고 서늘한, 조용하고 경건한 사원은 도심 속의 별세계였다. 그 속에서 정상급 공연이 한여름밤의 꿈처럼 펼쳐졌던 것이다.

영국의 여름은 축제 시즌이다. 공연장은 도처에 널려 있는 문화유산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뿐 아니라 케임브리지대학 킹스칼리지 채플도 유명한 파이프오르간 연주회장이다. 리즈성 같은 아름다운 고성의 잔디밭은 수만명이 참여하는 야외 클래식 공연장이다. 이달 초 리즈성 마당에선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군악대가 함께 연주했다. 문화와 역사가 켜켜이 쌓인 나라에선 들쳐볼수록 볼거리가 많아진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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