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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박 영화에도 한국 영화음악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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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Knockin' on Heaven's Door'를 틀어 주세요." 요즘 음악프로의 단골 신청곡 중 하나는 신인 가수 유미가 부른 '천국의 문을 두드립니다'이다. 곽재용 감독의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 천방지축 여형사 전지현. 애인이자 고등학교 교사 장혁. 심야에 마약범들과 벌인 총격전에 끼어들어 장혁은 총을 맞고 죽음을 당한다. 그를 못 잊어 하며 빌딩 옥상에서 자살을 감행하는 전지현의 비애어린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바로 '천국의 문…'이다.

음악은 이제 영화 흥행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장년층이 기억하고 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러브 스토리', 소피아 로렌의 처연한 표정이 지금도 심금을 울리는 '해바라기', 시베리아 설원을 배경으로 한 '닥터 지바고'. 영화 내용 못지않게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어 주는 감성적인 배경음악은 이 영화들을 추억의 명화 반열에 올린 원동력이라고 본다.

그러면 젊은 영화 애호가들이 성원을 보냈던 영화의 경우는 어떨까. '접속'의 라스트. 서로 어긋나기만 했던 PD 한석규와 전도연이 반가운 마음으로 해후하는 장면에서 사라 본의 경쾌한 사랑의 찬가 'A Lover's Concerto'가 빠져 있다면? 곽경택 감독의 '친구'에서 부산 영도 네거리를 교복을 입고 달리면서 4명의 친구가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여줄 때 흘러 나오는 로버트 팔머의 박력있는 로큰롤 'Bad Case of Loving You'. 또 있다. 북파된 여간첩 김윤진과 남한 정보부 요원 한석규의 비극을 예고하는 사랑 장면에서 은은한 분위기를 돋워주었던 캐롤 키드의 'When I Dream'.

비오는 오후, 40계단에서 자행되는 난폭한 살인 사건의 음침함을 부추겨 주었던 '인정 사정 볼 것 없다' 중 비지스의 'Holiday'. 1990년대 인기를 끈 몇 편의 한국 영화에서 아마 음악이 없었다면 흥행 역사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자. 값싼 팝송 선곡 때문에 한국 영화음악은 사라져 결론적으로 한국 영화에는 한국 음악이 없다. 이것이 블록버스터 시대가 도래했다고 아우성치는 한국 영화계의 치명적 약점이다. 월드컵 때 만난 외국인에게 인기를 끈 한국 영화를 선물했다고 치자. '접속' '쉬리' '친구'…. 여기에 더해 한류 열풍을 몰고온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 등등. 여기서 한국적인 음악을 찾아볼 수 있나? 아쉽게도 모두 팝송이 한국영화 주제가로 쓰이고 있다.

왜 그런가. 근본 이유는 최소 경비로 최대 효과를 거두자는 제작사의 경제적인 논리 때문이다. 신작 영화의 배경음악을 새로 작곡하기 위해 요구되는 경비가 최소 3000만원에서 최대 6000만원. 하지만 작곡자가 웅장한 음악을 위해 70인조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녹음하면 곧바로 2000만원이 날아간다. 여기에 최소 석달 동안의 음악작업 중 소요되는 제반 경비를 빼면 실수익은 1000만원이 안 된다고 볼멘소리. 의식없는 제작자는 그래서 팝송을 쓴다. 흘러간 팝송의 저작권은 곡당 500만원 내외. 저작권만 해결되면 오늘이라도 바로 갖다쓸 수 있는 것이 팝송이다. 왜? 이미 만들어진 노래이기 때문이다. 값이 다소 싸다고 쓴 노래가 'Holiday'. '당신은 휴일 같이 나에게는 매우 편안한 사람'이라는 노랫말 속에서 정작 화면에서는 피가 솟구치는 살인 장면이 전개된다.

아마 노래를 부른 비지스가 '인정 사정 볼 것 없다'를 관람했다면 '우리 곡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다'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100% 물어줄 상황이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팝송의 노랫말에 어떤 뜻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멜랑콜리한 리듬에 맞추어 짜맞추기 식으로 외국 음악을 쓰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 영화음악계의 부끄러운 초상이다. 관객 1000만명을 돌파해 순수익 400억원을 돌파했다고 희색이 만면한 영화제작사. 그들은 영화를 흥행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배경음악을 위한 창작료 1억원도 안 되는 돈이 아까워 외국 음악을 갖다 쓰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통치자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며 '이제 미국에 굽실거릴 필요가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다 좋다! 듬직해 보인다. 그러나 민족의 정서가 담겨 있다는 영화 매체에서 줄기차게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경기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