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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를 조롱하기 위한 3류 코미디…"

중앙일보

입력

우리영화 "올드보이"가 심사위원상을 받은, 칸느 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작품이라는데 우선 흥미를 가졌다. 아카데미상처럼 영화적 재미는 크지 않지만, 그래도 국제적으로 이름있는 감독과 제작자, 배우들이 공정한 심사과정을 거쳐, 우열을 가리는 영화제로서, 전통과 명성을 갖고 있는 영화제의 최고 작품을 남들보다 좀 일찍 볼 수 있는 기회는 나같은 기계쟁이들이 쉽게 누릴 수 있는 호사는 아닐 터이다.

그리고 부시가와 빈라덴가 사이의 오래된 유착관계라든가, 이라크 전쟁의 부도덕성과 잔학성등을 심도있게 다룬 다큐형식이라는데 또한 흥미가 끌리기도 하였다. 나이가 들다보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헐리우드류의 오락성 영화보다는, 종교나 전쟁같은 인간 내면의 세계나 정체성들을 다루는 영화에 더 흥미를 갖게 마련인가보다. 칸느 영화제에서 15분간이나 기립박수를 받은 작품이 아니던가. 15분간이나!

그러나 관람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의 심정은 한마디로 소태 씹은 심정이었다. 이런 영화 보려고 직원들 눈치보며 시간을 내어, 마치 학교 땡땡이 치고 에로영화를 보러 간 심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스펨메일을 들여다 본 기분이라고 할까.

물론 그 중에도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던 사람들도 있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선 다큐영화의 특성상 오락성이 없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예술성을 중시한다는 프랑스 영화제에서 무엇을 근거로 예술성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는지 의심스럽다. 영화 전 화면에 걸쳐 어느 한 장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 장면도 없고, 관전자의 심금을 울릴 만한 출연자들의 처절함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다큐가 갖고 있는 혹은 다큐를 통해 기대했던 문제 분석의 단계별 긴장감도 없고, 사건과 사건 사이의 연관성도 없이, 기껏 TV 3류 코미디 축에도 끼지 못할 사소한 제스처를 군데군데 끼워 넣음으로, 억지 웃음이나 구걸하는 듯했다. 한마디로 작품성도 형편없다고 해야 할 듯 하다.

나는 영화평론가는 아니기 때문에, 또 무슨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하는지 모른다. 세계적인 영화인들에 의해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을 지나치게 폄하하게 된 것은 물론 나의 영화에 대한 지식의 부족때문일 것으로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이 굳이 그들과 같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이러한 작품은 나중에 비디오로 나온다고 해도 빌려보고 싶지 않을 정도다. (이거 불매운동에 영업방해에 해당하나...?)

언뜻 생각나는 것은 얼마 전 누드파문을 불렀던 이승연씨였다.

종군 위안부를 테마로 누드 사진을 찍은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어, 인터넷 등 각종 언론매체로부터 뭇매를 맞고, 위안부 할머니들 앞에 무릎꿇고 눈물로 사죄한 후, 관련 필름들을 불태우는 것으로, 겨우 마무리된 사건 말이다. 만약에 영화감독 무어가 한국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단언하건대, 벌써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상업적 이득을 위해서, 미국이란 국가를 모독하고, 조국을 위해 죽은 수백명의 병사들을 조롱했으며, 아무 것도 모른 채 불타는 빌딩에서 산화한 수천명의 죽음을 욕되게 했다. 그런 감독을 용인하고, 찬사까지 보내는 미국이란 사회의 포용성은 놀라울 뿐이다. (나 친미주의자..?)

그러면 영화의 내용을 잠시 들여다보자.

우선 영화의 주된 줄거리는 다들 알다시피 부시와 그의 각료를 조롱하기 위한 것이다. 부시의 멍청한 표정, 그의 말,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부시와 참모들의 코믹한 표정들, 초등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피격소식을 접하고 난감해 하는 부시의 표정들로 영화는 시작된다. 심지어는 9.11사태가 발생하기 전날 프랑스제 이불을 덮고 잤다는 것까지, 문제의 본질은 제쳐두고, 오직 부시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애를 쓰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코미디에 실없이 웃을 만큼 감정이 한가하지도 않고,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처참한 사건을 두고 값싼 농담거리나 주절거리고 있는 감독이 한심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정작 문제의 핵심인 9.11 사태의 화면은 암흑화면으로 처리하여, 온 세계를 경악케 한 그 악몽의 순간들, 뜨거운 불길을 피하여 100층 꼭대기에서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려 낙엽처럼 떨어져야 했던 사람들이 느꼈을 절망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었다.

사건후 미국에 머물던 빈라덴 일가가 미국을 탈출하도록 도왔다는 것을 무슨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양 강조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스스로 덧붙여 설명하기까지 하였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미국에 대한 투자가 미국경제의 6-7%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8600억불이라고 하니, 우리 돈으로 1000조쯤 되는 돈일 것이다. 그만큼 많은 돈을 투자한 나라의 두 번째 재벌이 빈라덴 일가이고, 이들과 부시가는 오랜 세월 같은 사업을 해 온 관계라고 한다. 사우디 국왕의 관심사항이고, 그만한 재력과 친분을 갖고 있는 사람이 출국을 원하고 있는데,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강도같은 잡범들을 잡는 형사들의 장면을 겹쳐 내보냄으로써, 같은 방식으로 취급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는데, 손길승이나 정대철을 잡범들과 같은 방식으로 경찰서 바닥에 꿇어앉히고 윽박지르며 취조하라고 한다면,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그들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이 영화가 쓰레기라는 증거는, 부시가 이라크 공격을 천명하는 연설을 하는 순간, 동시에 화면을 채우고 있는 이라크 어린아이들의 천진하게 뛰어 노는 모습이다. 마치 그처럼 순진 무구한 어린이들을 향해 폭탄을 퍼붓기라도 하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이라크 전쟁이 부시가와 미국의 이권, 석유를 향한 더러운 흥정의 결과라고는 하지만, 그 순간 이라크 공격에 나선 군인들의 행위를 그렇게 호도해도 좋은 것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9.11테러에 대한 정보에 부시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은 문책을 받아 마땅하다. 그리하여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던 기회를 상실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또한 공화당 의원들도 인정하듯이 잘못된 정보에 의해 이라크를 침공하게 되었다는 것도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라크 공격에 이르게 된 과정, 즉 후세인이 갖은 핑계를 대며 대량살상무기 사찰단의 사찰활동에 협조하지 않던 그 과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악의적 왜곡의 의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계경제의 상징이며 미국의 자존심인 무역센터 빌딩과 미국 힘의 상징인 펜타곤 빌딩이 공격을 받아 수천명의 무고한 자기 백성들이 죽은 상태에서, 잘못된 정보든 조작된 정보든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테러의 배후세력일 가능성도 있는 후세인이, 유엔의 무기사찰까지 고의로 회피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응징하기 위해 나서지 않을 대통령이 세상에 있을지 모르겠다. 후세인이 화학무기를 이용하여 자기국민을 수천명씩 학살했다는 명확한 증거까지 있는 상황에서, 사찰을 거부했다는 것은, 누구라도 후세인이 대량살생무기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유추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전쟁의 과정에서, 지금 이 순간도 많은 군인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하고 있다. 이들의 고통을 다큐로 엮어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후세에 교훈으로 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참전한 아들의 한 어머니를 내세워, 그가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미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다가, 아들이 죽자 슬픔에 잠겨 울부짖으며, 전쟁반대를 외치는 모습을 화면에 채우고, 부상병들의 비참한 상황을 편집하여, 이를 정부와 부시를 비난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은, 이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참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고, 죽은 후 이를 슬퍼하고 전쟁을 반대하게 되는 것 또한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처럼 너무도 당연한 인간적인 변화를 이용하여, 그 속에 무슨 대단한 반전의 메시지라도 있는 것처럼 떠드는 것은 다큐라는 이름을 더럽힌 졸작에 불과할 뿐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반전의 묘미가 숨어 있어야 할 마지막 장면은 하루가 지난 지금 생각나지도 않는다.

이제 며칠 지나면 무엇을 보았는지도 다 잊어버릴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대선을 앞두고, 부시를 조롱하기 위한 3류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류의 코미디를 매일매일 TV에서 보고 있으니, 굳이 먼 미국의 감독까지 나서 여기에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로 인하여 미국의 대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데, 솔직한 느낌은 그러한 호들갑조차 이 영화를 포장하려는 마케팅 기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의 영화로 영향을 받을 국민들이라면, 세계인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디즈니랜드가 영화 배급을 포기한 이유도 이런 저질 정치코미디가 디즈니의 명성에 아무런 득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영화의 값을 올려 되팔려는 상술에 불과할 지 모른다.

이 영화를 보고 박수를 쳤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말할 것이다.

"거봐라. 이라크전은 부시가의 이득을 위한 더러운 전쟁이지 않느냐. 이러한 전쟁에 우리 젊은 군인들의 피를 바칠 수는 없다. 파병을 철회하라."

감독 무어가 진실을 외면한 채, 정치적 비꼬기로 포장을 한 것과 같이, 아마 일부 반전론자들이 이를 재포장하여, 대단한 반전의 빌미라도 확보한 것처럼 떠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멍청한 부시 때문에 참전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이처럼 이라크 파병을 놓고 국론이 분열되는 것은, 워낙 분열 자체를 즐기는 우리 정부가, 국민들에게 참전의 당위성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데 있다. 아니 어쩌면 정부 자체가 왜 파병해야 하는지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명분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명분이 없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피해도 전혀 없고, 치안유지의 필요성도 없는 곳에 전후 재건을 해 주겠다고 우리 군대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 정부의 숱한 코미디 리스트중 단언 압권이 아닐 수 없다. (무어의 코미디는 우리 정부의 코미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크루드 지역이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제 이라크 정부가 출범하였다. 앞으로 새로운 이라크 정부는 시아파 위주로 구성될 것이다. 따라서 국익을 위한다면, 우리가 시아파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결정했어야 했다. 앞으로 크루드족의 자치 혹은 독립과 관련하여, 아랍족과 크루드족간에 이견이라도 발생하는 날엔, 크루드 지역에 파병된 한국군으로서는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테러리스트들은 새로운 이라크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러한 종족분쟁을 획책할 가능성이 크다. 즉, 크루드족 지역에 테러가 집중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러한 경우, 재건을 명목으로 파견된 우리 비무장 공병이나 의료진은 그대로 테러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일부 전투병들은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동료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이중의 고통속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 굴로 들어간 형국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정부는 지금이라도, 파병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국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대국민 설득작업에 나서야 한다. 또한 파병군의 구성을 비무장 지원군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들을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는 전투병 위주로 다시 구성하고, 탱크와 장갑차 등으로 중무장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파병지를 다시 협상을 하여, 시아파가 다수를 이루는 지역으로 변경해야 한다. 이왕에 도움을 줄 것이면, 이라크의 중심세력이 될 시아파를 돕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익에 최선이고, 향후 가장 빨리 안정된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곳이 시아파 지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 재건지원은 필요한 돈과 물자지원을 통해서, 우리 군이 아닌, 이라크 현지인을 고용하여 추진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병사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이라크에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할 수 있으며, 이라크인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쌓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몇몇 촛불 이벤트를 통하여, 국민들을 속이고, 얼렁뚱땅 정치적인 성공을 이루었다고, 이라크에서도 재건지원이니 뭐니 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려는 얄팍한 수를 쓰는 것은, 국제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기 바란다. 김선일씨의 죽음은 그러한 사실을 일깨우는데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이미 이라크 국민들도, 테러리스트도 우리 정부의 이러한 얄팍한 속임수를 눈치채고 있다는 반증이다.

아직 늦지는 않았다. 지금이 기회다. 김선일씨의 죽음을 이유로, 이라크 파병군의 조직과 파견위치 등에 대해 근본적인 검토와 변화를 협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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