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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담계의 단짝 장소팔과 고춘자…어렵던 시절 웃음 준 대중의 스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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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춘자야.” “네, 아버지.” “비가 몇 도냐?” “끓는 물은 백도인데 글쎄요. 비가 몇 도예요?” “비가 몇 도냐 하면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유행가에 들어있어. 비가 오~도다.” 1963년 장소팔(본명 장세건, 1923∼2002)과 고춘자(본명 고임득, 1922∼1994)가 펼친 따발총 만담의 한 대목이다. “그나저나 왜 이름이 장소팔이에요?” “장에 소 팔러 간 사이에 낳았다고 장소팔이라오.” “어머나, 그러면 가족들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형님은 중팔이, 아버지는 대팔이, 우리 할아버지는 곰배팔이라오.”

만담은 조선시대 서울·경기의 연희예술이었던 ‘재담소리’에서 출발한다. 소리와 춤 사이에서 흥을 돋우는 말잔치였던 재담은, 일제시대 독립적인 ‘개그’인 만담으로 이어지고 신불출이라는 불세출의 스타를 낳는다.

장소팔은 신불출을 잇는 만담계의 거장이다. 초등학교 학예회 때 ‘손오공’ 역을 맡았을 때 당시 일본에서 유명했던 만담가인 오성련의 눈에 띄었다. 오씨는 장소팔을 일본으로 데려가 만담 공부를 시켰고 42년 연예계에 데뷔한다. 고춘자는 원래 가수 지망생이었다. 일제 말기 연예위문단에 뽑혔고 해방을 맞았을 때는 함경도 아오지탄광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후 서울에서 악극단 활동을 하면서 만담가가 됐다. 두 사람은 50년대 군 위문공연 때 만나 단짝이 됐다. 어수룩하면서 엉뚱스러운 장소팔. 서글서글한 눈매에 쉰 목소리를 지닌 고춘자. 전쟁 이후의 비참과 가난 속에서 웃고 싶었고, 말하고 싶었던 대중들은 그들의 말재간에 시름을 잊었다.

걸작은 ‘딸라부인’이었다. 딸이 일곱이라 고민하는 얘기 끝에, 장소팔은 딸을 아들로 바꾸는 데가 있다고 말한다. “내가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웬 부인들이 ‘딸라 바꿔요, 딸라 바꿔요’라고 속삭이지 않겠어?” 사회풍자가 살짝 섞인 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은 배꼽을 잡게 했다. 60년대 장소팔-고춘자는 ‘내 강산 좋을시고’라는, 명승고적 탐방 만담쇼로 라디오 시대의 절정을 누리지만 70년대 TV가 보급되면서 퇴장한다. 이를 안타까워한 장소팔은 96년 만담보존회를 설립해 활동하기도 한다. 그의 아들 장광혁은 유머 컨설턴트가 됐다.

이제 ‘장-고 콤비’는 후배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다. 예능프로 ‘패밀리가 떴다’의 ‘유재석-대성’ 콤비, ‘웃찾사’의 기글스, 박영진-박성광의 개그 ‘박대박2’에는 ‘장소팔-고춘자 식’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힘든 시절을 웃겼던 추억의 수다가 이 시대 웃음의 피와 살로 녹아든 셈이다.

이상국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