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 氣의 세계에 理의 눈금을 새겨 넣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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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호 10면

이(理)란 대체 무엇인가
1 모든 개념에는 역사가 있다. 그래서 풍토와 맥락이 중요하다. 주자학은 이기(理氣)라는 단 두 글자 위에 자신의 체계를 구축해 놓았다. 대체 이 사유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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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理氣)는 얼핏 과학적 인식을 표명하는 듯하다. 그래서 통념은 기를 사물, 이를 원리의 언저리에서 읽어 왔다. 그런데 웬 일, 이 이(理)가 동시에 ‘도덕적’ 당위를 설파하고, 사회적 질서까지 포괄하는 것을 보고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범주를 뒤죽박죽 뒤섞은 이 한심한 사유를 그만 버릴까. 그렇지만 이 혼륜(渾淪)의 사고에 혹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루스 이리가라이의 말이 기억난다. “우리가 계속 같은 언어를 쓴다면 우리는 같은 이야기, 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기(理氣)를 따라가다 보면 거꾸로 우리의 무의식적 사고습관, 그 자동반응을 성찰하게 될지 모른다.

2 노장은 오직 기(氣)를 말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무의미’에 철저하고자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것이며, 그 ‘혼돈’에 함부로 감각의 일곱 구멍을 뚫지 말지어다. 그들은 그리스 회의주의자들처럼 시비와 선악의 판단을 멈추는 곳에 지혜가 자랄 것이라고 가르쳤다. 기의 영겁회귀에 의하면 인간사는 다만 거대한 시간의 강 속에서 다만 부침하며 흘러가는 하찮은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 삶과 죽음조차 ‘하나’인 동전의 양면일 뿐,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이 전부일까. 주자학은 구체적 시간성과 ‘일상’의 삶이 빠졌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주자학은 혼돈뿐이었던 기(氣)에 이를테면 ‘눈금’을 새겨넣고자 한다. 그것이 이(理)이다. 눈금이 없으면 자로 길이를 잴 수 없고, 저울로 무게를 달 수 없다. 주자학은 이(理)와 더불어 실재하는 차이와 구분을 말하기 시작한다.

노장의 무(無)는 차이를 꺼리고 불교의 공(空)은 구분을 두려워한다. 불교는 분별(vikalpa)이야말로 삶의 고통을 몰고 오는 원흉이라고까지 극언한다. 그리하여 사물 속에는 본래 아무런 구분도 차이도 없음을, 즉 평등(平等)을 역설했다. 그러나 이 전적인 부정은 교각살우 아닐까. 주자학은 사물들의 차이를 인식에 속하기보다 사물 ‘그 자체에’ 속한다고 강조한다. 율곡은 어느 고승에게 “서리 내리면 온 산이 여위고, 바람 따뜻하면 뭇 꽃이 핀다”고 읊었다. 사물들의 세계는 이질적 계기들이 부딪치고 화해하는, 그러면서 질서를 잃지 않는 역동적 무대다.

3 이(理)의 코드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맥락에 따라 이(理)의 의미는 다양하고 변주는 무상하다. 잠깐 방심하면 길을 놓친다. 이를테면 이는 우선 기의 ‘원리’와 ‘구조’를 뜻한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때로 이는 기의 ‘재질’과 ‘기능’을, 때로는 그 ‘원인’과 ‘이유’를 뜻하기도 한다. 심지어 기의 ‘연관’과 ‘가치’를 말할 때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뿐인가. 때로 이는 기의 ‘존재’ 자체를 가리킬 때도 있다면 말 다했다. 이 한 글자의 의미는 이렇게 전방위적이고 범주 사이는 자유롭게 건너뛴다.

그 소이(所以)의 메뚜기를 따라가다가 지칠 때쯤,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왜 그러면 안 될까. 주자학은 “이(理)를 통해 기(氣)의 ‘내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어한다.” 그 코드들이 풍부하고 다양할수록 그들의 협력이 세계의 모습을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도와주지 않는가.

4 사물은 ‘대나무바구니의 가닥들처럼’ 일정한 코드와 원리들로 짜여 있다. 삶을 경영하려면 이 질서와 구조를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주자학을 ‘주지주의’라 부른다. 라이벌 육상산은 이 노선에 반대해 자신의 내적 본성에 대한 직접적 자각을 강조한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주자학은 소크라테스처럼 ‘지식’이 우리를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사물과 환경에 무지하다면, 더구나 우리 자신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해서 캄캄하다면 어디를 향해 무슨 걸음을 떼놓을 수 있겠는가.

주자는 이 주지주의적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대학(大學)』을, 그 신성한 경전을 뜯어고치기까지 했다. 그의 모험은 한마디로 “성의정심(誠意正心) 이전에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있다”로 요약할 수 있다. 길을 나서기 이전에 나침반이 필요하다. 자신의 의지를 도야하고 편견과 충동을 제어하자면 그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어느 현자는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전에 먼저 너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물으라고 했다. 소크라테스의 경구는 지금도 유효하다. “너 자신을 알라.” 주자학은 사르트르처럼 인간이 행동을 통해 자신을 창조할 뿐이라는 생각에 기겁을 한다.

로크가 인간에게 본유관념이 없다고 선언하자, 라이프니츠는 철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자연은 자신의 패턴을 따라 움직이는 이(理)처럼 미리 프로그램된 모나드로 구성돼 있다.” 그는 진리를 대리석 속에 갇힌 헤라클레스에 비유했다. 조각가는 그가 숨을 쉴 수 있도록 덮개를 쪼아내고 주변에 붙은 방해물들을 떨쳐낸다.

주자학 또한 인간의 도덕적 개발이 자신의 내적 본성을 자각하고 그 결에 따라 몸을 맡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자연이 당위를 현시한다면, 즉 “우리가 누구인가”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드러난다면 자연과 당위는 연속돼 있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이(理) 안에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이 자연의 이름으로 함께 있게 되었다. 주자는 말한다. “길은 인간(의 인위적 선택)으로 하여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道非因人方有).”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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