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참을 수 없는 문화의 가벼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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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정치가 문화를 아주 가볍게 취급한 대표적 사례가 구총독부 건물인 국립박물관의 철거였다고 나는 단언한다.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문민정부의 법통 (法統) 은 상해임정에 있다고 했다. 곧이어 중국에 산재한 애국열사 시신의 고국 봉환을 서둘렀다.

여기까진 훌륭했다.

뒤이어 민족정기를 드높이기 위해 구총독부 건물의 폭파론이 제기됐다. 오욕 (汚辱) 의 역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것이냐, 아니면 자손대대로 압제와 오욕의 상징물을 그대로 둔 채 기죽어 살 것이냐는 단순논리로 몰아갔다.

철거를 거부하면 매국노고 찬성하면 애국자가 되는 인기몰이 포퓰리즘 정치의 희생물이 국립박물관 철거였다고 본다. 합리적인 정부였다면 박물관 이전 또는 신축계획을 먼저 세웠을 것이다.

새 건물이 마련되기까지는 현 건물을 쓰고 이전 완료 시점에서 구총독부 건물을 해체할 것인지, 타지역으로 옮겨 축소조성할 것인지를 공론에 부쳤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이라는 바람몰이식 정치논리와 정치인들의 치적 (治績) 주의에 쫓겨 총독부 건물, 아니 국립박물관은 사라졌다.

지금 박물관은 급조된 임시건물에서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경복궁 한 모퉁이에 더부살이 하듯 비켜 서 있다.

성급한 정치논리가 문화를 짓뭉갠 좋은 선례로 기록될 것이다.

"경주는 하루가 다르게 유현 (幽玄) 한 분위기를 상실해가고 있다. 무자비한 도로확장, 유적을 무참히 훼손하며 들어서는 고층아파트 무리들, 시민정신을 타락시킬 경마장 건설계획…나는 지난 주일 선도산 정상에서 경주분지를 굽어보며 고도 (古都) 의 비참해져가는 몰골을 보았다. 분노와 아픔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

강우방 (姜友邦) 경주박물관장이 파괴되는 고도의 문화현장에서 '우리가 경주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 라는 절망적인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정치상황과 경제논리가 합쳐져 문화유산을 파괴.황폐화시키는 현장이 바로 경주다.

TK세력이 왕성하던 시절 경부고속철도가 경주를 통과하는 노선을 결정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해 경주와 인근 지역경제발전을 꾀한다는 경제논리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대구~부산 직진을 마다하고 삼각형의 두 변을 거치는 경주 우회로를 돌면서 수천억원의 건설비용을 낭비하고 신라 고도의 문화재를 마구잡이로 파헤치자는 괴상한 논리였다.

돌 하나, 흙 한줌 속에서도 우리의 문화유산이 살아 숨쉬는 땅에 개발과 건설이라는 경제논리만을 내세운 야만이 계속 자행되고 있지 않는가. 최근들어 새 정부의 기획예산위원회가 또 기발한 문화파괴정책을 내놓고 있다.

정부의 문화부문 사업중 사업성이 취약한 지방의 국립박물관.중앙극장.도서관 정보화사업.자연사박물관.현대미술관.국어대사전 편찬사업 등을 민간에 위탁 운영토록 한다는 계획이다.

국난의 위기경제상황에서 한푼의 돈이라도 아끼고 채산성을 높이자는 의도 자체는 높이 살만하다. 그렇다고 돈 생기지 않는 정부의 문화사업부터 정리해고를 한다? 기가 막히는 소리다.

나 자신 시장경제 논리의 신봉자다.

공급자 아닌 수요자 입장에서, 경쟁을 통해 상품의 질을 높이고 철저한 경영마인드로 고객봉사를 하는 기업정신이라야 오늘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적용할 곳이 있고 피해야 할 곳이 있다.

예를 들자. 경주박물관의 한해 예산이 48억원, 이중 입장료 수입은 고작 2억원이다. 46억원이 적자다.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민간에 위탁하자는 발상이다. 경영의 귀재인들 누가 이를 떠맡아 성공할 수 있겠는가. 민간이 손댈 수 없는 국가 기반시설의 설치.운영은 정부가 해야 할 중요 책무다. 도서관.미술관.박물관 이 모두가 한 나라의 문화인프라다.

국가 기반시설이다.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정부의 존재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시장경제 논리대로라면 숱한 돈을 뿌리면서 시장.구청장을 굳이 뽑을 필요가 없다. 유능한 기업체가 서울시를, 경주시를 맡아 운영하면 지금보다 훨씬 잘 운영할 것 같다. 왜 경찰을 두는가. 에스원같은 우수한 방범업체에 맡기면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일 것을. 청와대 비서실이 왜 필요한가.

대기업 기획조정실이 맡으면 더 능률적일 것을. 경제성과 시장논리를 따지기 전에 생각하고 지킬 것이 따로 있는 것이다.

야만과 문명의 차이가 따로 있지 않다. 문화를 경시하면 야만이 성하는 법이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문화 경시풍조가 세상을 너무 어지럽히고 있다.

권영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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