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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영어구연 배우는 어르신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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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1일 오전 10시 서울 삼성동 강남구노인복지관 지하 1층 교육관. ‘영어동화구연 강사 양성 과정’에서 한 여학생이 낭랑하게 책을 읽는다.

“Papa, please fly me to the moon!”(아빠, 저를 달로 데려다 주세요!)

아빠에서 아이로, 아이에서 요정으로 목소리가 자유자재로 오갔다. “외국에서 살다 왔나 보다” “연극배우인가”하는 이야기가 학생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It’s a big moon. (…) I’m really really sorry”(저것은 큰 달이군요. (…) 정말 죄송해요.)

11일 강남구노인복지관에서 영어동화구연 강사 양성 프로그램을 수강하는 어르신들이 강사의 지도에 따라 동요를 부르며 율동을 하고 있다. [조문규 기자]


손으로 큰 원을 그리며 보름달 모양을 만들다가 이내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sorry”를 발음할 때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전 11시 본격적인 실습시간이 시작됐다. 강사가 영어노래와 율동을 선보이자 모두 어린 아이처럼 따라하기 시작했다. 여느 영어수업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학생들은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다. 평균연령 65세.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공 방숙자(64·여)씨는 “여기서 배워 아이들에게 영어로 동화를 들려주며 자원봉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신난다”며 웃었다.

지난달 27일부터 이곳에선 목요일 오전마다 ‘영어동화구연 강사 양성 과정’ 수업이 열린다. 만 60세 이상의 강남구내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강좌다. 돋보기를 써도 눈이 침침해 글씨가 잘 보이지 않지만 강사의 말에 연필로 밑줄을 그어가며 듣는 자세가 자못 진지하다. 강선희 강사는 “동화구연이 쉬운 것 같지만 온몸을 사용하다 보면 진이 빠진다”며 “젊은 엄마들도 쉽지 않은데 열기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율동을 열심히 따라하던 박춘자(69·여)씨도 “한번 놀고 마는 소모적인 배움이 아니라 사회에서 다시 쓸 수 있는 배움이라 좋다”며 적극적이다.

강남구 노인복지관은 ‘어르신이 오면 행복하다’는 뜻의 ‘행복노래(老來) 프로젝트’를 이번 달 시작했다. 박종원 관장은 “노래나 댄스 일색이던 노인 대상 문화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했다”고 설명했다. 배워서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라는 설명이다. 김영권 강남구 노인복지과장은 “저소득층 위주로 진행되던 노인복지사업을 누구나 혜택 볼 수 있는 ‘보편적 복지’로 바꿔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수업비는 무료로, 강남구청이 지원한다. 주니어리더십 양성 과정, 인문학 강좌 등 6개 강좌가 10월까지 계속된다. 현재 570여 명의 수강생이 등록을 했고 여성 수강생이 70%를 차지한다. 특히 ‘영어동화구연’은 노인 대상으로는 서울에서 처음 개설됐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조남범 원장은 “아직까지 우리는 노인을 ‘봉양’해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한다”며 “다양한 경험을 가진 노인들의 지적 수준을 고려해 다채로운 고급 강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관장은 "이런 고급 프로그램을 노인 일자리와 연계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밝혔다.

임주리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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