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벌떼 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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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동물 가운데 가장 발달된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벌, 특히 꿀벌의 세계라고 한다. 동물 행동학자들은 꿀벌의 조직이 인도 특유의 신분.계층제도인 '카스트' 와 똑같다고 보고 있으며, 그래서 꿀벌의 세계를 '국가' 라 호칭하는 학자들도 있다.

계급과 역할분담이 그만큼 철저하다는 뜻이다.꿀벌의세계가 인간사회와 유사하다고 보는 또 하나의 관점은 적자생존 (適者生存) 과 약육강식 (弱肉强食) 의 논리가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가령 장마철에 벌통속에서 조용하고 은밀하게 이뤄지는 대량살육 드라마를 꼽을 수 있다.인간사회에도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 이란 말이 있지만 꿀벌들도 비오는 날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날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꽃들에 물이 고여 있어 꿀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평소 열심히 모아둔 꿀의 비축량이 줄어들게 된다.

2단의 벌통에서 일벌이 가장 많이 늘어날 때는 5만마리에 달하는데 그 양식으로 5일분의 꿀이 저장돼 있다 하더라도 3일간 계속 비가 내리면 이틀분 밖에 남지 않게 된다. 거기서 다시 이틀간 비가 내리면 5만마리가 전멸할 것은 당연하니 식구 수를 줄이기 위해 대량살육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힘 약하고 계급이 낮은 4만마리를 죽이면 힘 세고 지위가 높은 벌들이 열흘은 더 살 수 있을 테니까. 양봉 (養蜂) 업자들은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분가 (分家) 시키는 방식을 취한다.식구 수를 줄여주면 물론 벌통속에서의 대량살육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 벌들의 지능도 많이 발달한 탓인지 요즘에는 식량이 줄어들고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예감하면 보금자리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고분고분 죽어주지는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엊그제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벌어진 벌떼소동도 식량이 모자라 죽음을 맞게 된 벌들의 과감한 '엑소더스' 로 보인다.

주말 비가 내린 뒤 2~3일 후의 시점이니까 그럴 법한 일이다. 그렇다면 소수를 살리기 위해 다수가 묵묵히 죽어줘야 했던 벌 생태계의 질서가 획기적으로 바뀌는 셈이다.

30여년간의 강압통치로 절망과 고통속에서 신음하던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벌집 들쑤신 듯한' 과감한 봉기는 죽음을 피해 살길을 찾아나선 벌들의 탈출과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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