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17> 추안핑<下>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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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영국 유학 시절의 추안핑(왼쪽). 후차오무는 추안핑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92년 상하이에서 휴가 중인 후차오무(오른쪽). 김명호 제공

1948년 4월 하순 허베이(河北)성 구석에 머무르고 있던 중공 중앙위원회 앞으로 “5월 1일이 곧 다가온다. 방귀를 갈길 엉덩이가 없다. 빨리 엉덩이를 보내라”는 전보가 한 통 날아들었다. 국제 노동절을 앞두고 신화사 사장 랴오청즈(寥承志)가 보낸 전문이었다. “말할거리가 있어야 말을 하고, 엉덩이가 있어야 방귀를 뀐다”는 말은 마오쩌둥이 평소 즐겨 쓰던 민간 속어였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에게 달려갔다. 마오의 거처는 70여 리 떨어진 청난좡(城南庄)이었다.

전문을 읽은 마오쩌둥은 ‘빨리 엉덩이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마오의 정치 비서인 붉은 수재 후차오무(胡喬木)가 초안을 잡았다. “각 민주당파, 각 인민단체 및 사회 지도층은 신속히 정치협상회의를 열어 인민대표대회 소집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과 민주연합정부 설립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자”는 메시지를 작성했다. “마오쩌둥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 같은 구호들은 마오가 삭제했다.

중국의 운명을 바꾼 ‘5·1구호’는 중국인들에게 생소한 내용은 아니었다. 45년 4월 중국공산당 제7차 대회에서 마오쩌둥은 “국민당의 일당 독재를 폐지하고 각 당파와 무당파 대표들과의 협의를 거쳐 임시연합정부를 우선 수립하고, 자유선거를 통해 국민대회를 소집한 후 정식으로 연합정부를 수립하겠다”며 공산당과 국민당에 회의를 품던 사람들을 홀리기에 충분한 정치 보고를 한 적이 있었다.

공산당이 집권할 경우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던 민주인사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던 무당파 지식인 중에는 대륙을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신화사가 발표한 5·1구호는 이들의 발목을 잡았을 뿐 아니라 해외에 있는 지식인들을 제 발로 귀국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추안핑도 마오의 연합정부론에 기대를 걸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직후 후차오무는 저우언라이에게 1년 전 국민당에 의해 정간된 ‘관찰(觀察)’의 복간을 제의했다. 저우도 “그렇게 독자가 많았던 잡지라면 당연히 복간시켜야 한다”며 동의했다.

일면식도 없었던 후차오무 덕에 ‘관찰’은 다시 선을 보였지만 선전 위주의 잡지로 서서히 변해갔다. 발행부수도 3000부가 고작이었다. 제호가 ‘신관찰(新觀察)’로 바뀌고 새로운 사람이 주편에 임명되자 추안핑은 ‘관찰’을 떠났다. 후차오무는 추에게 신화서점 부총경리와 출판총서 관리국장 직을 배려했다.

56년 초여름 중공 중앙은 광명일보(光明日報)를 민주당파에 완전히 넘겨주며 총편집 후보를 물색했다. 후차오무는 추안핑을 추천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통일전선부장 리웨이한(李維漢)은 “광명일보는 인민일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순수한 민주세력의 기관지”라며 광명일보의 공산당 조직과 당원이었던 총편집과 부총편집을 철수시켰다.

이듬해 4월 1일 추안핑은 광명일보 총편집에 취임했다. 그는 인사말을 통해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은 풍랑 속에 떠 있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당과 정부를 감시해라. 분석과 해결은 그들의 몫이다. 가슴에 대나무를 한 그루씩 심자. 독자들이 우리를 감시한다”고 강조했다.

6월 1일 추안핑은 통전부가 개최한 좌담회에 참석해 ‘마오 주석과 저우 총리에게 보내는 의견서’를 발표했다. 최근 몇 년간 제(諸) 정당들의 관계가 예전 같지 못한 것은 공산당의 당 천하(黨天下) 사상 때문이라며 초기에만 흉내를 냈을 뿐 연합정부론과 5·1구호를 스스로 위배한 공산당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당 천하사상이야말로 종파주의의 뿌리였다. 다음 날 광명일보 1면에 전문이 실리자 국내외에서 갈채가 쏟아졌다. 대만의 장제스와 미국의 존 덜레스 국무장관은 환영 성명서를 발표했다. 추안핑은 68일 만에 광명일보에서 쫓겨났다. 그의 이마에 대우파(大右派)라는 딱지가 붙었다.

추의 두 번째 부인은 남편이 몰락하자 이혼을 요구했다. 당시 베이징에는 전범수용소에서 풀려난 건장한 중년남자가 많았다. 이들은 해외로 도망친 가족의 송금 덕에 주머니가 두둑했다. 추의 부인은 자유를 찾은 왕년의 국민당 장군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름을 거론하면 아직도 중국인들의 귀에 익숙한 남자들이 새벽녘에 추의 집에서 슬그머니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사라지곤 했다.

거리에서 밤을 새우던 추안핑은 양 두 마리를 끌고 가출했다. 만리장성 인근의 습기 찬 움막에서 버섯을 키우며 양젖으로 허기를 달랬다. 막내아들이 중앙음악학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수박 한 덩어리와 사이다 한 병을 구해 찾아갔지만 기숙사 벽에 자신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덕지덕지 붙은 것을 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추안핑은 문화혁명 초기인 66년 9월 행방불명이 되는 날까지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바꾸지 않았다. 우상 숭배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이성을 갖춘 지식인이었지만 그가 살던 시대에는 뒤를 더 조심해야 했다. 시공의 개념이 부족한 결점이 있었지만 사람을 선동한 적이 없다 보니 대중을 헷갈리게 하지도 않았다. ‘추안핑이 추구했던 품격이 영원히 사라졌다’며 애석해 하는 중국인이 많은 것을 보면 그가 부활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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