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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감제도 ‘일제 잔재’라고 깎아내려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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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행정안전부는 현행 인감제도의 폐지를 목표로 10일 장관 발표에 이어 11일 공청회를 열었다. 인감제도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고 비용이 많이 들며 인감 관련 사고가 많다는 이유에서다. <6월 12일자 ‘인감제 운용 사회비용 연 5000억’>

멀리 낙랑(BC 108∼AD 314) 고분 유물에서도 보듯이 우리나라 인장공예의 역사는 수천 년이나 된다. 일본에서 1871년에 시작한 인감제도는 1914년에 ‘인감증명규칙’을 공포해 조선에서도 시행됐다. 이것이 61년에는 ‘인감증명법’으로 이어졌고 일본에서 74년에 간접증명방식으로 바뀐 것을 우리도 본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감증명규칙은 일본이 자국에서 시행하고 있던 제도를 조선에 확장한 것이다. 관례에 의존해 온 거래관계를 인감제를 통해 국가가 공적으로 확인해 주는 진일보한 서비스 행정이었다. 일제가 이를 악용했다고 해서 95년의 인감 역사와 사회 안정에 끼친 공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정부는 인감제도를 단순히 일제 잔재로만 매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화재보호법은 어떤가. 대부분의 국보·보물 등이 일제가 지정한 것들이 아닌가. 일제강점기 때 지은 건축물들을 근대문화재라고 해서 지정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목적을 정당화하려면 국민감정을 자극할 필요도 있겠으나 ‘일제 잔재’란 말은 듣기 거북하다.

정부는 서명의 편리성과 인감의 안전성을 모두 확보하는 방향으로 재고해 봄이 어떨까 한다. 인감 폐지로 인해 잃는 것도 분명히 따져봐야 한다.

이장열 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