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이 뇌 때문일까요?” "내 탓이냐 뇌 탓이냐, 그것이 문제로구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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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10면

BBC 라디오는 오늘도 ‘죽기 전에 읽어야 할 과학서 20선’을 녹음하기 위해 한창 준비 중이다. 지난주 첫 방송 청취율이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자 BBC 텔레비전이 슬그머니 동시중계를 제안했다. 다윈은 TV 화면에 자신이 나오는 것이 부담스럽고 꺼려졌지만(그가 여러 사람 앞에 나설 때 심한 울렁증으로 고생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모두가 원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신경학 전문의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가 초대됐다. 탁자 왼편에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오른편에는 두뇌 모형이 놓여져 있다.

장대익 교수가 열어본 21세기 다윈의 서재<8>-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다윈=안녕하세요. 오늘은 ‘죽과20’의 두 번째 시간입니다. 한 주밖에 방송이 안 나갔지만 BBC 시청자들이 벌써 이 프로그램의 이름을 이렇게 줄여서 부른다는군요. 오늘은 의사선생님을 초대했습니다. 어서 오세요.

색스=반갑습니다. 솔직히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 다음에 제 책이 소개되리라곤 상상을 못했습니다.

다윈=난 순서에 큰 의미는 두지 않았는데. 하하. 그저 20권을 고른 후에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부터 부르고 있거든요. 잘 알 거요. 내가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의사가 되려고 에든버러 의대에 갔다가 2년도 못 돼 자퇴하고 만 일을. 당시는 마취제도 있기 전인데, 어린 환자의 손발을 침대에 꽁꽁 묶고 수술을 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배우려니 정말 죽을 지경이었죠.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형님 모두 의사였는데 나는 너무 힘들었소. 그래서 난 의사들을 존경해요.

색스=저는 뇌에 이상이 있는 환자들을 다루기 때문에 철철 흐르는 피를 매일 봐야 하는 다른 의사들과는 좀 다르죠. 대신 환자의 ‘고통’이 아닌 환자의 ‘기이함’과 매일 싸웁니다.

다윈=맞아. 책 제목도 참 기이하더군.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니. 정말 그런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있소?

색스=물론이죠. 평생 잊을 수 없는 환자였어요. 그는 성악가였는데요, 시각에 뭔가 문제가 있었어요. 흥미로운 것은 유독 사람에 대해서만 인식을 못하는 거였죠. 병세가 점점 악화되니까 아내의 얼굴도 못 알아보더군요. 하지만 사람들의 말투나 특이한 행동 등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구별을 하긴 했어요. 고도의 추상적 추론을 통해서 말이에요. 가령, 아인슈타인의 사진을 보여 주면 누군지는 알아맞히긴 하는데요, 일반인들처럼 얼굴을 인식해서가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독특한 머리 스타일과 콧수염을 기억해서 추리하는 거예요.

다윈=생활이 참 불편했겠네.

색스=한번은 검사가 끝나 그가 가려고 자기 모자를 찾고 있었어요. 옆에는 그의 아내가 서 있었는데요, 손을 뻗어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기 머리에 쓰려고 하는 거예요. 제 책 제목이 그 기이한 광경 때문에 지어졌죠. 나중에는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몸도 못 알아봐 옷 입는 데도 힘이 들었어요. (뇌 모형을 가리키며) 여기 시각피질 부위에 생긴 문제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의 인생에는 음악이라는 선물이 있었기에 그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가족과 친구들도 실제로 그를 자신들과는 조금 다르다고만 생각했지요. 이것은 신경병 환자와 그 주변인들의 삶을 오랫동안 관찰해 본 결과입니다.

다윈=이 책을 ‘죽과20’ 목록에 선뜻 넣은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선생 책을 읽고 있으면 의학이 참 따뜻하게 느껴지거든. 환각, 자폐, 정체성 상실 등으로 기이한 인생을 살고 있는 환자들을 뇌과학자의 입장에서 냉철히 분석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들만의 세계와 삶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 있잖아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남자의 일상을 이해하려고 그의 집에 직접 찾아가는 광경은 여느 의사나 과학자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어요. 이런 의미에서 선생의 글에서는 늘 호기심 충족과 감동이 함께 묻어나는 것 같아요.

색스=칭찬은 감사한데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에요. 의사와 과학자의 입장에서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저도 신경병 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누구보다 건망증도 심하고, 약간의 틱 증세도 있고, 저녁에는 꼭 밥과 생선에만 집착하며, 수동타자기로만 글을 쓰죠. 심지어는 음악회에 가서 가끔씩 돌아 앉아 글을 쓰는 것에 쾌락을 느낀답니다. 기이함에 관해서라면 저도 결코 뒤지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그들과 쉽게 교감할 수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윈=그렇게 본다면 나도 같은 과예요. 어렸을 때는 딱정벌레 수집에 광적이었고, 『종의 기원』 출간 전에는 따개비에 미쳐 8년 동안 그놈만 연구했거든요. 그것을 모아 책을 썼더니 1000쪽이 넘었죠. 어떤 정신과 의사가 내 일대기를 분석하더니만 진단명을 주더군요. 중증 편집증 환자.

색스=하하. 하지만 별의별 사람들을 연구하다 보니 소위 ‘정상적인 뇌’라는 게 있기나 한지 의심이 들 때가 많아요. 그저 조금씩 서로 ‘다른 뇌’를 가진 것뿐 아닐까요?

다윈=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점점 ‘뇌가 곧 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뇌영상 기술이나 신경약물학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보니 행동을 뇌의 문제로 환원해서 보려는 흐름이 점점 강해지고 있죠. 나도 ‘종교적 신앙이 결국 뇌의 작용의 산물’이 아닌가 의심한 적도 있었지만, 뇌를 제대로 연구해보진 못했소. 만일 내가 지금 청년이라면 뇌과학자가 되려 했을지도 몰라요. 어쨌든 선생의 책은 뇌과학과 신경의학의 놀라운 성과를 대중이 교감할 수 있는 언어로 탁월하게 표현한 이 분야의 고전이오. 어떤 이는 자넬 ‘의학계의 계관 시인’이라더군요.

색스=오히려 뇌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자신의 잘못까지 뇌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생긴 것 같아 조금 불편합니다. 혹시 제가 그런 사조에 일조한 것은 아닌가 반성도 해보죠.

다윈=‘내 탓이냐 뇌 탓이냐’ 그것이 문제로구먼. 하하.
-색스는 가장 최근에 뇌과학과 음악의 관계를 이야기한 『뮤지코필리아』(알마 펴냄)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KAIST 졸. 서울대에서 진화론의 역사와 철학 연구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덕여대에서 자연과 인문의 공생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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