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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현장법사라도 손오공 있어야 폼이 나는 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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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10면

화과산에서 태어난 못된 원숭이 손오공(왼쪽 위)이 천궁(天宮)에 올라 말썽을 피우는 장면을 그린 상상도.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도’를 상징한다. 한편으로 중국인들의 실생활 속에 담겨 있는 모략의 세계를 대변한다.

손오공이 등장하는 『서유기(西遊記)』는 현장법사가 손오공과 저팔계·사오정 등의 행자(行者)를 거느리고 서역을 찾아가 석가모니 부처의 경전을 입수해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오는 얘기다. 흔히 삼장법사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손오공과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받은 법명. 원래는 현장법사다.

유광종 기자의 키워드로 읽는 중국 문화-모략1

전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둘이다. 덕이 높아 당(唐)의 조정으로부터 불교 경전 입수와 번역이라는 중책을 맡은 불승(佛僧) 현장법사, 화과산의 돌멩이 속에서 태어나 하늘세계를 휘젓고 다니던 말썽쟁이 원숭이이자 뛰어난 무력의 소유자 손오공이다. 책은 이 두 주인공을 축으로 해 다양한 얘기를 펼친다.

서역으로 향하는 길고 긴 여정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요괴(妖怪)는 이들의 높은 덕망과 뛰어난 무공(武功)에 의해 제압된다. 급기야 서역에 도착해 방대한 분량의 불교 경전을 입수하는 데 성공한다.현장법사와 손오공. 이 둘은 뭔가를 상징한다. 현장은 이상이자 숭고한 목적의식을 대변한다. 손오공은 현장이 지닌 담대한 뜻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현실적 방도다. 현장의 뜻이 아무리 높다 한들 그 많은 요괴 앞에선 ‘맛난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스승인 현장법사를 보호하기 위해 여의봉을 휘저으며 요괴를 제압하는 손오공은 불법의 입수와 호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고 손오공만이 모든 것을 차지한다면 『서유기』는 시시하다. 싸움 잘하는 원숭이가 벌이는 무협소설에 그치고 만다. 그 뛰어난 무공을 뒷받침하는 이상과 높은 지향성이 뒤를 따라야 소설은 제대로 격을 갖춘다. 현장법사를 도(道)라고 할 수 있다면, 손오공은 그를 보완하는 현실의 방편이다. 이 둘이 조화를 이뤄야 커다란 일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다. 뜻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손오공의 무공, 이것이 중국인이 생활이나 비즈니스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략(謀略)의 세계다.

한국에서 ‘모략’이라는 단어는 다소 부정적이다. ‘못된 꾀’쯤으로 번역되거나 최소한 정상적인 절차와 방도를 거치지 않으면서 남을 속이는 아이디어쯤으로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중국인이 생각하는 모략은 긍정적이다.만주족이 세운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淸)의 국운이 기울던 19세기 말엽 황제 자리에 오른 광서제(光緖帝)는 서태후(西太后)의 권세에 눌려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청 황실의 중흥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변법(變法)운동을 벌인다. 단순히 외국의 무기를 수입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근대적인 제도를 도입한다는 혁신적인 개혁이 그 내용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 정치에 어두웠다. 군부 실력자이자 처세의 달인인 원세개(袁世凱)의 말을 순진하게 믿은 게 화근이다. 최고 권력자였던 서태후에게 광서제의 거사 계획을 일러바친 원세개의 배반으로 그는 결국 별궁에 갇혀 죽고 만다.

이 비장미 넘치는 황제의 실패를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중평은 대강 이렇다. “뜻과 이상은 갖췄지만 그를 현실세계로 옮기는 모략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 뜻이 높으면 뭘 하느냐, 그를 실행할 방도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 황제의 마음 속에 ‘현장법사’는 들어 차 있었지만, 그를 현실세계에서 운용할 ‘손오공’은 갖추지 못했다는 얘기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자연스레 모략을 이야기한다.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사람의 생활 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수단과 방법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중국의 전쟁사를 펼쳐보면 다소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서로 총을 허리에 차고 “하나, 둘, 셋…”을 센 뒤 권총을 뽑아 들어 상대방를 쏘는 그런 결투는 없다. 서로 말을 타고 긴 창을 든 채 마주 달려 오며 상대방을 먼저 쓰러뜨리는 단순한 결투도 없다. 워털루 전쟁처럼 벌판에 마주 선 군대가 서서히 상대방을 향해 걸어 오면서 총을 쏘는 방식의 결투도 없다.

대신 중국인들은 아름다운 여인을 적진에 보내 적장의 품에 안기게 한 뒤 술잔에 약을 타 죽임으로써 적의 대오를 무너뜨리는 미인계(美人計), 상대방에 대항할 병력이 부족했지만 오히려 성문을 활짝 열어 놓고 성벽 위에 올라 거문고를 타면서 여유만만함을 과시해 오히려 적으로 하여금 겁을 먹고 물러나게 만드는 공성계(空城計) 등을 선호한다.

모든 꾀를 다 구사해 보다가 효과를 보지 못한다면? “바로 튀는 게 상책(走爲上計)”이라고 마무리하는 ‘삼십육계(三十六計)’가 그야말로 가장 중국인다운 전투 방식이다. 그 모든 바탕이 모략이다. 중국인이 펼치는 모략의 세계는 바다처럼 넓다. 모략은 중국인의 속내를 읽기 위한 필수 입문서(入門書)다.


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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