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 '창작과 비평'통권 100호 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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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먼길을 어찌 다 가며 도중의 괴로움을 나눠줄 사람은 몇이나 될까?오직 뜻있는 이를 불러 모으고 새로운 재능을 찾음으로써 견딜 수 있을 것이오, 견디는 가운데 기약된 땅에 다가서리라 믿는다. " 지난 66년 1월 고고성 (呱呱聲) 을 울린 문학.사회 계간지 '창작과 비평' (이하 '창비' ) 권두논문에서 당시 28세였던 젊은 편집인 백낙청 교수 (서울대.영문학) 는 이렇게 비장한 어조로 글을 맺었다.

그리고 32년이 지난 지금 예전에 소망했던 '기약된 땅' 에 조금이나마 접근했을까. 한국 현대사와 굴곡을 같이 하며 진보적 지식인들 손에서 떠나지 않았던 '창비' 가 다음주 초 1백호를 내놓는다.

순리대로라면 25년만에 달성됐을 기록. 그만큼 도중에 시련과 좌절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백교수는 1백호 책 머리에서 '드디어' 라고 술회한다. "드디어 통권 100호를 낸다" 라고.

수많은 작가와 평론가를 배출하며 60~70년대 지식인들의 지적 목마름을 적셔주었던 '창비' 의 출발은 소박함 자체였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갓 돌아온 백교수를 주축으로 소설가 한남규, 신문기자 이종구.임재경씨등 5명이 동참해 서울 공평동의 문우출판사 사무실을 빌려 창간호를 냈다.

당시 가격은 70원. 모두 9만원 (당시 사립대학 등록금은 3만원 정도) 을 들여 1백30쪽짜리 2천부를 찍었다. '서울 리뷰' '흐름' '전위' 등으로 제호를 달자는 의견 가운데 평범하면서도 힘있는 '창작과 비평' 이 채택됐다.

이후 일조각.신구문화사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다 69년에야 독립된 잡지사로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74년에는 도서출판 창작과비평사를 창립하며 본격 단행본 시대도 열어나간다. 잡지 또한 정권의 외압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신군부의 칼날 앞에 '창비' 도 어쩔 수 없었다. 80년 여름호로 강제 폐간되며 창사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복간까지 기다린 세월은 8년. 87년 6월 항쟁으로 불붙은 사회 민주화 바람 속에 88년 봄호로 새롭게 '부활' 한다. 폐간 기간에도 수난은 계속돼 85년 부정기간행물 형태로 통산 57호를 냈다가 출판사마저 폐쇄당했다.

출판사는 86년 8월 '창작사' 란 이름으로 재등록됐다. 반면 정부와 6개월 간의 마라톤 협상 끝에 백교수가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조건과, TV와 신문을 통해 "우량도서 출판에만 매진하겠다" 는 굴욕적 (?) 선언도 수용해야 했다.

주위에선 '정권에 타협하려면 아예 자폭하라' 는 따가운 비판을 쏟아져 '창비' 로선 이중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반면 시련이 많은 만큼 아름다운 추억도 적지 않다. 예로 60년대에는 서로 가난한 가운데도 청진동 골목에서 소주와 빈대떡으로 정을 나눴고, 74년 봄호에 김지하씨의 시가 오랜 만에 실리자 판매를 맡은 회사가 그동안 팔린 대금을 어음이 아니라 수표로 결제해주는 인기를 누리기도.

그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안정된 독자층. 이념 논쟁이 시들해진 90년대 들어 다소 줄긴 했지만 정기 구독자 5천여명을 포함해 매호 평균 1만5천여부 가량이 늘 팔린다.

'아픔' 이 깊을수록 '체질' 도 단련되는 법. 백교수는 최근 IMF 위기에도 '초발심' 을 잊지 않았다. 그는 "IMF는 오히려 분단극복의 기회" 라며 "민족과 국민의 내일을 위한 '창비정신' 은 변함 없을 것" 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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