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10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끝내 달갑지 않은 기색임에도 불구하고 묵호댁은 당장 걷어붙이고 나섰다. 승희의 눈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여행가방을 안방에도 던지고 난 다음, 궂은 일부터 찾아 수습하기 시작했다. 조리대 아래에 있는 수채구멍에 퀴퀴하게 들어찬 음식 찌꺼기들을 호비칼로 속시원하게 후벼낸 다음 물이 저절로 빠져나가게 뚫어놓았다. 그리고 도마와 식칼을 속살이 드러나도록 씻어 조리대에 얹고, 조리대 아래의 시멘트 바닥 속살이 아작아작하게 드러나도록 두 번 세 번 씻어내는 것이었다.

횟감을 먹음직스럽게 장만할 줄 안다는 장담도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날생선 본래의 살결을 다치지 않고 알맞은 크기로 빚어내는 횟감이 맛을 내는 요체라는 것을 터득한 세련된 칼질이었다. 묵호댁이 조리해서 내놓는 회접시를 유심히 관찰한 술꾼들이 요리사를 초빙해 왔느냐고 물으며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희도 솔깃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승희가 그녀를 식당에 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 이면에는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섣불리 발설하거나 남이 알아채게 행동해선 안되었다.

양양으로 떠났던 변씨가 불쑥 식당문을 밀치고 들어선 것은 묵호댁이 식당에 묵은 지 이틀째가 되는 저녁이었다. 봉환은 이틀째 방구들 신세를 지고 있다는 철규가 걱정되어 자취방으로 달려간 사이에 변씨 먼저 식당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가 묵호댁을 발견한 것은 이제 왔느냐고 반기며 방을 나서는 승희보다 먼저였다. 언제나 식당으로 들어서면, 시선이 승희가 서 있던 조리대 쪽으로 건너가는 것이 습관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변씨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놀랐다. 급기야 말문조차 막혀버려서 언제 왔느냐고 다그쳐 묻는 승희의 채근에도 대꾸가 나오지 않았다.

변씨에겐 양과부인 그 여자가 영동식당 조리대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것은 천지개벽이 아닌 이상,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조화였다. 그러나 눈을 씻고 다시 보아도 진부읍내 땅거미식당 양과부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 경황중에도 한 가지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묵호댁도 문을 밀치고 들어선 변씨의 모색을 대뜸 판별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씨가 썩은 통나무처럼 꼼짝 않고 서 있는 까닭까지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런 변씨를 향해 묵호댁은 한 가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승희 몰래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윙크라고 말해야 할 그 신호는 우리끼리만 알고 지내자는 척후병들의 암호와 같은 것이었다. 그 야릇한 눈짓이 내포하고 있는 은밀한 뜻을 모를 턱이 없는 변씨는 온 삭신이 오싹하고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오십평생을 넘기기까지 간이 뚝 떨어지도록 놀랄 일도 숱하게 겪어왔지만, 그처럼 놀란 것은 아무래도 처음인 것 같았다. 그나마 묵호댁에서 얼른 시선을 거두었기 망정이지 서툴게 굴었더라면, 눈치 빠른 승희에게 모든 게 들통날 뻔하였다.

둘 곳 없이 헤매던 시선을 내리깔며 변씨는 승희의 채근에 이제 막 당도했다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뛰는 가슴은 여전했다. 그는 술청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뭔가 개운치 않은 눈치까지는 알아챈 승희가 따라 나섰다. 묵호댁이 야릇한 눈짓을 보냈던 것은 승희가 아직까지는 자신의 본색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에 식당에서 벌어질 북새통을 생각하자니 눈앞이 캄캄했다.

윤종갑이는 진부장을 다니지 않아서 묵호댁의 얼굴을 모르겠지만, 태호는 익히 알고 있을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을까. 우선 그것부터 궁금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양양으로 떠나던 그 이튿날 아침, 윤씨와 태호는 진부령의 황태를 구입하러 떠나고 없었다. 선착장 어귀로 나선 변씨는 영문을 모르고 해적해적 뒤따라오는 승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낯선 여자는 도대체 누구여?"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는 사람이에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