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10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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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주민등록증을 애써 보여주려는 이면에는 물론 자신의 신분에 대한 미심쩍음을 해소시키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호감을 사려는 그 여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승희는 내키지 않았다. 우선 그 여자가 주인 없는 집에 들어와 버티고 앉은 몰염치부터 호감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겉으로는 어수룩한 체하고 있지만, 속에는 어떤 꿍꿍이속이 들어앉아 있는지 알 수 없는 여자처럼 보였다.

고용을 전제로 찾아온 집이라 하더라도 가게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게 상식이었고, 파출부를 수소문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섭섭하더라도 냉큼 돌아서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는 그런 염치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끝내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가로젓는 승희를 원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주민등록증을 다시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냉큼 일어서며 작별하려는 낌새는 아니었다. 또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기 때문이었다.

승희가 그 여자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 것은 두번째로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문득 승희 자신의 옛날 모습이 그 여자의 담배 피우는 모습에서 희미하게 짚여왔다.

나도 서울을 떠나 주문진 선창가에 자리잡기까지 한동안 저런 황량한 모습으로 아프게 떠돈 적이 없지 않았다는 회한이 가슴을 스치고 지난 것이었다.익숙한 것이라곤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었던 그 처절한 낯섦. 배가 고파도 여자였으므로 식당조차 아무렇게나 들어갈 수 없었던 어색한 고립감. 살던 곳인 서울이란 곳에 두고 온 뿌리쳐지지 않는 갖가지 어두운 잔상들과 상념들. 도회의 세련된 장식을 흉내내었으므로 오히려 천박하게 보였던 바닷가 카페에서의 영락감. 두 달간이나 계속되었던 스산스런 여행의 이력들이 그녀의 뇌리를 가파르게 스쳐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여자에게 보편성을 지닌 여성적인 자질이나 세련된 염치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을지도 몰랐다. 떠도는 사람들이란 대체로 이 여자처럼 까닭없이 오만하게 마련이었다. 가파르고 황량한 삶의 굴곡을 거치면서 자질구레한 염치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제거되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넓은 곳에서 보면 모든 사물은 작게 보이고, 좁은 곳에서 보면 한송이의 꽃도 크게 보인다.

그래서 골짜기에서 보면 작은 개활지도 들녘처럼 넓게 보이고, 바다에서 보면 육지도 섬으로 보인다.선입감을 가지고 보면, 이 여자는 염치를 모르는 부랑배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여자가 살아온 거북등 같이 성긴 세월에 작은 관심이라도 갖게 된다면, 이해의 폭은 그만치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승희는 드디어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눈치를 대뜸 알아챈 여자는 가방 속에 쑤셔박았던 주민등록증을 다시 꺼내 건네주었다.

그녀의 흑백사진이 붙은 낡고 때묻은 그 증명서에는 양필순 (梁必順) 이란 이름이 박혀 있었다. 본적과 주소도 모두 동해시였다. 그러나 승희는 증명서를 꼼꼼하게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파출부로 쓰고 싶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주소지가 동해시라면, 주문진에는 잠자리할 곳도 마땅치 않은 여자였다. 방 하나가 따로 있긴 하지만, 아이도 없는 봉환이와의 동거생활에 바로 옆방에서 혼자 된 여자가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없어진 지명이지만, 택호는 묵호댁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네요 하면서 승희는 증명서를 건네주었다. 승희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묵호댁은 끝내 마뜩찮은 기색을 알아챈 것 같았다.

"월급을 많이 달란 얘기도 아니라요. 일이십만원 받아서 속옷이나 사 입고 지내면 됐지 욕심만 째지게 앞서서 수월찮은 월급 받아봐야 주전부리로 소일할 계집도 아니고, 송금해서 먹여 살릴 처자식도 없어요. 요새 같은 아야야시대에 하루 세 끼 굶지 않고 밥먹고 잠잘 자리 있으면 그게 극락이지, 건방지게 월급이 무슨 필요하겠어요. " "그냥 이삼일 지내다가 마땅한 일자리가 나서면, 그리로 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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