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살배기때 바다 건너간 세계인 구희진씨의 회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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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우연히 글로벌화돼버린 여자, 구희진 (미국명 제인.25) .세살 때 (주) 한양에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쿠웨이트에 갔던 게 사연의 시작이었다. 무술로 단련된 아버지가 현지 근무를 마치고 사우디 국가경비대에 채용되고 말았다. 영국계 인터내셔널스쿨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84년말 다시 아버지를 따라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이곳에서 남가주대학을 다니면서 그녀는 세계화된 인물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소양을 익혔다. 누가 봐도 동양계로 생긴 미국사람. 아니 세계 어디에 갖다놓아도 그곳 여자.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본 적도 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득 솟은 그리움 같은 것.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으며 배웠던 우리말은 저만치 그냥 버려져 있다. 하지만 혼자 있으면 한국인이었다. 정체성 같은 한자어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런 아련한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뿌리는 흔들리거나 탈색되지 않는가 보다.

할리우드를 누비고 다녔다. 소위 엔터테인먼트 전문리포터를 꿈꾸면서….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었지만 하염없이 간혹은 실없이 스타들을 만나 말을 걸고, 그냥 그랬다. 숀 코너리와 킴 베이신저를 만나 인터뷰했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한국의 케이블방송사 캐치원.G - TV에 이어 유럽 엔터테인먼트쇼 전파를 탔다. 학교는 일단 도중하차했다.

지난해초엔 자신의 활동을 담는 파일럿 (시험제작) 필름을 만들어 한국과 홍콩을 돌았다. KBS를 포함, 몇군데서 OK사인이 떨어졌다. 신바람은 계속됐다. 그러다 보니 한국어가 달렸다. 남들은 좀 짧은 한국어를 매력으로 삼곤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본격적으로 예쁜 우리말을 익히고 말하기 시작했던 한 한국여자. 참 묘하다.

그녀에겐 로컬화란 단어를 들이댈 여지가 없다. 유아기를 잠깐 한국에서 보내고 본격적인 로컬화를 사우디의 영국계 학교 분위기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미국에서의 또 한차례 로컬화. 그건 바로 글로벌 개념과 일치했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그녀의 로컬화는 해외의 현지화가 아니라 바로 한국화하는 작업이었다.

"내가 하는 것을 본격적인 문화행위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문화적 작업을 그리 거창한 것으로 간주하고 싶진 않다. 글로벌.로컬, 둘을 합성한 글로컬, 그런 단어에 대한 감은 없다. 다만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아이덴티티라는 말에 자꾸 집착이 갈 뿐이다. 최근 제작자로 변신한 배우 더스틴 호프먼을 만나 영화를 얘기하면서도 절감했던 게 바로 그것이다. "

그래 아이덴티티. 한자말로 정체성이다. 로컬에서 글로벌이든, 글로벌에서 로컬이든 상관없이 정체성은 같다. 어찌보면 글로컬은 구차스럽다. 국경없는 사회에서 그런 단어의 구분은 무의미한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역시 자신감은 확고한 정체성에 비롯되는 게 분명해 보인다.

"할리우드, 물론 거창한데 또 따지고 보면 별세상도 아니다. 배우가 될 셈으로 '플레이 하우스 웨스트' 라는 유명 연기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곧 정식캐스팅될 것 같다. 2000년에 또다른 모습으로 만나자. "

LA=허의도 기자 〈huhe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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