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본산 '정신문화연구원' 존폐 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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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학 연구의 본산임을 자임하며 새 출발을 모색하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문연.원장 李榮德) 이 최근 기획예산위원회의 정부출연연구기관 정비계획에 따라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자 학계가 술렁이고 있다.기획예산위가 총 54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을 '1부처 1연구기관' 으로 정비해 성과에 따른 계약 지원방식이나 민간위탁경영 등 시장원리를 적용하겠다고 나서자 우선 정문연의 문이 닫힐지도 모른다고 느끼는 학자들이 이 문제를 한국학 또는 한국 인문학의 존폐문제로 인식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문연이 한때 정권의 이데올로기 정당화에 관여한 적이 없지 않으나 지금은 대표적 한국학 연구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 따라서 어떻게든 그 기능을 존립시킬 필요가 있으며 다른 정책연구기관과 같이 '시장' 에 내놓는 방식으론 자립이 곤란하다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다.이런 여론을 의식해 최근 교육부는 고육지책으로 정문연을 서울대로 이전하는 방안을 모색중이다.

이미 4년전에도 논의되다가 취소된 바 있는 이 안을 다시 꺼낸 것은 기획예산위 방침을 따르면서 정문연을 살릴 수 있는 방안으로 떠올랐기 때문. 그러나 이 방안에 서울대는 물론 다른 대학에서도 비판의 소리가 높다.연세대 국학연구원 (원장 송복) 의 S교수는 "비대한 서울대에 정문연까지 덧붙인다면 학문발전의 불균형을 야기할 것" 이라고 우려했다.

정문연에 근무한 바 있는 경희대 K교수도 "국립대학에 귀속시킨다면 정문연의 방향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 고 비판한다.한편 서울대 인문대 C교수는 서울대의 관료주의적 풍토, 외국학문 수입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학풍을 지적하며 "결코 효과적인 한국학 연구가 이뤄지지 못할 것" 이라고 우려한다.

인문대 H교수는 "규장각 자료도 제대로 연구할 조건을 마련하지 못한 서울대가 반성과 개혁없이 정문연을 끌어들인다면 그마저 죽이는 결과가 될 것" 이라고 단언한다.

문제는 이 방안이 별로 현실성이 없다는 점. 이 기회에 좀더 판을 크게 벌여 근본적인 검토를 하자는 주장들이 보다 설득력을 갖고 있다.이번 정리작업에서는 빠졌지만 정부기관인 국립국어연구원 (원장 이익섭).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원순).정부기록보존소 (소장 김선영) 와 사실상 정부지원으로 운영되는 민족문화추진회 (회장 이우성).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독립기념관 (관장 박유철) , 그리고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박석무).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이정빈) 등의 한국학 연구 및 지원기능도 개편대상에 넣어 보다 효율적인 한국학 연구기관의 창출을 시도해보자는 것이다.원로 한국학자인 서울대 김완진 (국어학).박병호 (법제사) 명예교수등은 "이번 연구기관 통폐합은 거품을 빼되 연구역량을 강화하는 방식이 돼야 한다" 고 주문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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