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진의 서핑차이나] 베이징이 권좌를 유지하는 방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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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 발발 20주년을 맞았다. 전세계 언론은 앞다퉈 각종 기사와 칼럼을 쏟아내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3일자에 미국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페이민신(裴敏欣) 선임연구원의 칼럼을 실었다. 1980년대 내내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의 노선투쟁에 시달리던 중국 공산당이 천안문 사태를 계기로 엘리트들을 포섭하고 변신에 성공한 사실을 거시적으로 분석했다. 중국 공산당의 노회한 통치술을 파헤친 것이다. 역사는 가끔 역설적으로 흘러간다. 민주주의를 희생한 경제개혁은 중국의 굴기와 중국 공산당의 생존을 선사했다. 그러나 중국이 그 기회비용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 하는 점은 전 세계 차이나 워쳐들이 앞으로 눈여겨 봐야할 사항이다. 다음은 페이민신 칼럼 전문이다.

오늘날 베이징 권좌의 자축 분위기를 느끼기는 어렵지 않다. 중국 공산당은 1989년 6월 4일 천안문 광장의 민주화 운동을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다. 이후 공산당은 국내에서는 놀라고 분개한 민중과 맞닥뜨렸고 국제적으로는 고립됐다. 옛 소비에트 진영의 공산주의 몰락은 더욱 당원들의 사기를 꺾었다. 파멸이 임박했다는 의식이 베이징에 충만했다.

20년 후 상황은 더욱 변했다. 중국은 새로운 경제 및 지정학적 거인으로 부상했다. 공산당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다.

중국 지도자들은 정치적 생존을 위한 자본주의와 세계화를 포함해 일당 지배를 가능케 해주는 마법의 공식을 발견했다고 믿는 듯이 보인다. 외부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성공이 독재를 위한 확실하고 새로운 모델을 구축했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가 천안문 비극 발생 2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동시에 천안문 사태 이래 중국공산당이 정치적 독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추구한 전략과 불가능해 보였던 그들의 권력 유지가 어떻게 가능했었던가 뒤돌아 볼 시점이다.

분명히 중국공산당의 재기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속적인 고도 성장이었다. 그러나 실행착오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그들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보완적이고 정교한 정치적 전략을 개발했다.

천안문 사태를 통해 공산당 지도자들이 얻은 교훈은 엘리트 통합이 생존에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점이었다. 1970년대 말 중국이 경제 개혁을 시작하면서 정치적으로 진보파, 기술관료, 보수파들의 대연합으로 구성된 정당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진보파와 보수파들은 1980년대 내내 속도와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상층부의 불일치는 중국 사회에 혼란스러운 신호를 보냈다. 천안문 사태 동안 정책 결정 과정은 마비됐다. 천안문 이후 공산당은 최고위층에서 진보파가 숙청됐다. 이후 결성된 기술관료와 보수파의 연합은 자본주의를 해방시키고 민주주의를 억압했다.

천안문 사태를 겪으며 지옥을 넘나드는 경험을 한 공산당은 사회 엘리트를 흡수하고 당의 기반을 확대해야 한다는 교훈 또한 얻었다. 민주화 운동은 중국의 지식인과 대학생들이 조직하고 이끌었다. 또 다른 천안문을 막기 위해 공산당이 숙고해 얻은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중국 사회의 엘리트를 포섭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잠재적인 반정부 세력으로 조직될 수 있는 뿌리를 제거해야 했다.

천안문 사태 이후 공산당은 지식인과 전문가 및 기업인들에게 정치적 지위와 특권을 주면서 포섭했다. 이 전략은 성공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잘 교육된 관료, 전문가, 지식인으로 구성원을 바꾸는 변신에 성공했다.

물론 공산당 지배에 도전하는 세력이 나타나면 무자비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당은 억압 도구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보다 효율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체득했다. 소수 반체제 그룹만을 타겟으로 적용할 뿐 더 이상 평범한 백성들의 사생활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에서 공개적인 반대는 억압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충분히 보장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소련의 붕괴는 서방에게 중국의 전략적 가치를 반감시켰다. 그러나 초기의 충격을 극복한 뒤 중국공산당은 소비에트 권의 붕괴를 예로 들면서 중국 대중들에게 어떤 정치적 변화도 국가적 재난을 불러올 수 있다는 공포감을 조장함으로써 교묘히 상황을 통제했다. 공식적인 선전을 활용해 중화 민족주의를 부추김으로써 공산당은 중국의 국가 명예의 수호자로서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세계화의 물결은 냉전에 이어진 또 다른 황금 기회를 제공했다. 중국 시장을 보고 달려든 전세계적인 자본을 향해 중국 공산당은 우호적인 파트너를 자임했다. 이어 서구 기업가들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과 자연스런 우호관계를 체결했다.

전세계에서 중국으로 몰려온 이들은 발생 가능한 위험을 회피했다. 중국에서 그들은 비즈니스를 함에 있어 예상 밖의 자유를 구가했다. 노조나 환경 규제가 필요치 않았다. 의도적이었건 아니건 서구 기업은 중국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로 변신했다. 서방 국가들의 실용적인 정책에 따른 국제 자본의 지지는 중국 공산당 지배를 정당화 시켰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정치적 전략은 지나칠 정도로 성공했다. 공산당은 이제 그 성공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상층부에서의 기술관료와 보수파 동맹, 중간층에서 관료, 전문가, 지식인, 기업가의 연합을 통해 공산당은 자율적인 엘리트로 진화했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대중적 기반을 상실했다.

부적절한 사회 정책, 불평등 심화와 국가와 사회 사이의 점증하는 긴장을 야기한 천안문 사태 이후 공산당의 친 엘리트 정책으로 인해 격렬한 반발이 시작됐다. 외부적으로는 서구 기업인들과의 동맹이 느슨해졌다. 국가 독점과 중상주의적 무역정책을 불러온 중국의 관료 자본주의는 공산당의 진정한 자본가 친구들과 소원하게 만들었다.

중국 공산당이 천안문 사태 이후의 성공을 축하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 좋은 시절이라는 잘못된 환상을 가져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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