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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병, 치유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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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유럽은 바뀔 수 있는가. 무엇을 바꿔야 하나. 포르투갈에서 폴란드까지 유럽에는 많은 국가가 있으나 영국을 빼곤 기본적으로 하나의 사회 모델이 있을 뿐이다. 이 모델은 세금이 많고 규제가 심하며 정부 지출 규모도 크다. 노동 시장은 무척 경직돼 있다. 다른 특징은 저성장과 고실업이다. 정부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50%, 실업률은 10% 정도다.

문제는 없는가. 물론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수십년간 유럽은 개인의 행복과 공공의 번영 모두를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스태그네이션은 유럽의 특징이 돼버렸다. 동아시아 국민은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실감치 못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유럽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는가.

이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유럽 각국 정부가 야심 찬 개혁을 추진해 왔다는 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실제로 재정 지출 및 세금 삭감, 노동시장 규제 철폐 등과 같은 시장지향적 개혁을 추진해온 각국 정부는 예외없이 선거에서 패배했거나 조만간 그렇게 될 것 같다.

예컨대 스페인의 경우 지난 3월 대처리즘을 지지하는 보수당 정권이 사회당에 참패했다. 이라크 참전 및 친미 성향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총리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 지출과 복지 수준을 높게 유지하겠다는 사회당 정권에 대한 열망도 한몫을 했다.

스페인 선거 직전 지방선거를 실시한 프랑스의 경우 자크 시라크가 이끌던 보수파는 선거에서 단순히 진 게 아니라 완패했다. 시라크 정권이 법정 은퇴 연령 전에 퇴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식의 결단력이 부족한 개혁 정책을 시행한 탓이다.

독일 사례를 보면 좌파 정권 역시 현상 유지를 원하는 세력에 당하기는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독일은 1998년 이래로 중도좌파 정부가 집권해왔다. 2002년 재선 후 사민당 정부는 '어젠다 2010'이라는 야심 찬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이 계획은 실업.건강 혜택을 줄이고 노동시장을 더 유연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그때부터 고난에 빠졌다. 사민당 지지율은 곤두박질쳐 현재 지지율은 역대 최저인 23% 선이다. 슈뢰더 총리에게 단 하나 좋은 소식이 있다면 다음 선거가 있는 2006년 가을까지는 유권자들과 대면할 일이 없다는 정도다.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정부는 이탈리아 역사상 최장기 정권이나 현재 최악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연정 파트너인 기독민주당과 국민동맹이 줄리오 트레몬티 재무장관을 해임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트레몬티 장관이 세금과 지출 삭감을 밀어붙이는 등 국가 개혁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우파.좌파에 관계없이 유권자의 요구는 같다. "우리는 변화를 원치 않으며 어쩔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이 (비용을) 부담하라", "허리띠를 졸라매는 건 괜찮지만 먼저 (정부부터) 모범을 보이라"는 식이다.

유럽은 자신들의 복지제도가 세계화 시대 이전에 형성됐다는 점으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다. 문제는 중국.말레이시아처럼 (아시아 지역의)저임금 국가들이 아니다. 유럽의 '중국'은 옆에 있다. 임금이 독일의 6분의 1 에 불과한 폴란드나 헝가리.슬로베니아 등 동구 국가들이 문제다.

과거 유럽에선 노동조합이 임금과 노동조건 등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업체가 동쪽으로 옮겨가 버린다. 노동력을 아웃소싱할 수도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 아마도 성난 유권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부를 비난하지 말라. 급격하게 달라진 생산 수단과 양식이 진짜 범인이니까."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일지 모른다. "적응하라, 그렇지 않으면 몰락한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유럽이 직면한 잔인한 선택이다. 이는 시라크.베를루스코니.슈뢰더 정부처럼 선거로 퇴출시킬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유럽은 변할 수 있는가. 유럽에 다른 선택은 없다.

요제프 요페 독일 디 차이트 발행인
정리=기선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