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1> 대동아의 신화 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암향부동(暗香浮動)하는 매화의 향기처럼 한자(漢字)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게 모르게 동북아시아를 하나로 이어 준 문화유전자 역할을 해 왔다. 알다시피 한자는 뜻글이어서 글자만 알면 말을 잘 몰라도 의사를 나눌 수 있다. 그러기에 본바닥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들도 “높은 봉우리의 후지산(孵士山)”이냐 “1만2000봉의 금강산”이냐를 놓고 토론을 벌일 수 있었다.

한자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문자 이상의 것이었다. 마치 그것은 생물의 DNA처럼 복제되고 증식되고 전파되면서 동아시아인의 문화유전자로서 작용해 왔다. 특히 일본의 가토 도루 교수의 새로운 한자 해석을 문화유전자 ‘밈’으로 대체해 보면 그 DNA의 지도까지 그릴 수 있다. 맨 꼭대기에 올라가면 3000년 전의 은(殷)나라가 만들어 낸 조개 ‘패(貝)’ 자와 주(周)나라에서 형성된 양 ‘양(羊)’ 자를 추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은나라 사람들은 중국의 풍요한 동방 지역에서 살던 농경족이어서 유형의 재화(財貨)를 중심으로 삶을 영위해 왔다. 우리는 이미 재화라고 할 때의 그 재(財)와 화(貨) 자에 모두 조개 패(貝) 자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조개 패 자는 고대의 화폐로 사용된 ‘자안패(子安貝)’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조개 패 변에 쓰는 한자들은 모두 돈과 관계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물건을 매매(賣買)하고 무역(貿易)을 하여 보물(寶物)을 얻는 그 모든 한자 말에는 조개 ‘貝’가 따라다닌다. 심지어 내가 학교에서 처음 받은 공책 표지 위에 커다랗게 찍힌 고무도장도 바로 이 ‘賞(상)’자였다.

한편 주나라 사람들의 조상은 중국 서북부의 유목민족으로 불모의 스텝(steppe) 지방이나 사막을 이동하며 살던 노마드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땅보다는 항상 ‘하늘에서 큰 힘이 내려오는’ 보편적인 일신교를 숭상하며 살았다. 자연히 양을 잡아 제례를 올리는 그 생활 풍습에서 양의 제물을 통해 선악(善惡)을 나누고, 의(義)와 불의(不義)를 가리고, 미운 것과 추한 것의 의미를 분별했다. 그러니까 은나라와는 대조적으로 주나라 사람들은 무형의 이념을 추구하는 데서 삶의 가치를 찾았다. 그것이 바로 의로울 ‘의(義)’, 아름다울 ‘미(美)’, 착할 선‘(善)’처럼 무형의 가치를 담은 ‘양’ 자의 문화유전자다. 식민지 아이들이 수백 번 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일본 육군의 노래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친다(天に代わりて不義を討つ)”에도 그 이데올로기의 한자 유전자의 흔적이 숨어 있었다.

동방계 농경집단인 은나라의 조개 ‘패’ 자가 만들어 낸 것은 현실주의적인 물질문화이고, 서방계 유목집단인 주나라의 양 ‘양’ 자가 구축한 것은 관념주의적 정신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이 충돌하고 혼합된 은주혁명(殷周革命)에서 오늘의 그 거대한 중국 문화의 틀(祖型)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래서 밖으로는 예의와 신의를 따지고 안으로는 실리를 계산하는 한족들은 조개와 양이 만난 문자의 나라에서 수천 년 동안 두 얼굴을 지니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상인(商人)’이라는 말도 은인(殷人)에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은을 ‘商(상)’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이며, 나라를 잃고 물재를 거래하는 은나라 백성들이 생업을 일삼은 데서 오늘의 ‘상업’ ‘상인’이란 말이 생겨났다는 설이다.

그러고 보면 가토 교수의 그 조개와 양의 문화 읽기는 한족이나 중국 문화에서 그쳐서는 안 될 것 같다. 한국으로 그리고 왕인(王仁)을 통해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그 한자의 조형인 ‘패’와 ‘양’의 두 나선형 문화유전자가 우리의 머리와 가슴속으로도 복제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과 ‘패’의 한자 ‘밈’이 한국에 오면, ‘양’은 ‘이(理)’가 되고 ‘패’는 ‘기(氣)’가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거기에서 행인지 불행인지 ‘이’가 ‘기’를 누르면서 ‘양’이 조개 ‘패’를 압도한 조선조 500년의 역사가 전개된다.

한편 ‘양’이 일본 땅으로 건너가면 에도시대의 ‘부시도(武士道)’가 되고 ‘패’는 조닝(町人)의 상인문화로 변한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통신사를 비롯, 한국의 주자학을 들여옴으로써 병마(兵馬)를 충효(忠孝)로 바꾸는 통치를 폈다. 그래서 300년 가까운 칼싸움 없는 평화를 유지해 왔다. 탈아주의의 주역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아버지만 해도 일본의 서당인 데라코야(寺子屋)에서 아이들이 주판과 산수를 배우는 것을 분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자사(自死)의 일본사』를 쓴 모리스 방게의 증언대로 하녀가 없는 가난한 사무라이들은 밤에 몰래 얼굴을 가리고 가게에서 물건을 사 왔다는 것이다. 무사(武士)에도 ‘사(士)’자가 붙어 있으니 그들도 한국의 선비와 비슷한 ‘양’의 문화유전자를 지니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한자를 버리지 않는 한 일본의 내셔널리즘도 대동아도 모순에 빠진다. 그리고 식민지 아이들은 한(韓)·왜(倭)·양(洋), 세 한자 말을 알고 있어서 청요리는 물론이고 한식·왜식·양식을 혼돈하지 않고 가려 먹을 줄 알았으니까.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반도인(半島人)’입니다 joins.com/leeoyoung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