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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연평해전 영웅 돌아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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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29일 서해 북방어장에는 긴장이 흘렀다.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이어 추가 도발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양측 해군간 충돌 위험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연평도 앞바다의 해상전진기지에는 10년전인 1999년 6월 제1차 연평해전에 참전했던 연제영 소령이 있었다. 10년전엔 참수리정 정장(대위)였지만, 이제는 2대의 참수리정을 이끄는 편대장이 됐다. 다음은 중앙SUNDAY 전문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이어 연일 군사 도발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최전방 중 한 곳인 서해 북단 연평도 해역에서는 긴장감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꽃게잡이 어선들은 정상 조업을 하고 있지만 해군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제3 연평해전’을 앞두고 비상출동 훈련을 하는 등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 중앙SUNDAY가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남으로 5㎞ 남짓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해군 2함대 연평도 222 해상 전진기지에 승선했다. 그곳에는 10년 전인 1999년 6월 15일 제1 연평해전에 참전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연제영(38) 소령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치러진 29일 오후 9시10분. 파도 하나 없는 바다에 칠흑 같은 어둠과 정적이 깔렸다. 한 시간 반 전 참수리급 고속정 338호와 352호를 이끌고 해상작전에서 돌아온 연제영 소령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NLL 북쪽으로 북한 경비정과 중국 어선들이 내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때문이다. 연 소령은 전날 밤도 꼬박 새웠다. 오전 1시 중국 어선 50여 척이 NLL을 5㎞나 넘어 내려오는 바람에 동틀 무렵까지 힘겨운 퇴거작전을 벌여야 했다. 이날 밤은 최근 남북 관계로 긴장감이 커진 탓에 해군이 직접 나서야 했다. 자칫 중국 측과 외교 문제로 비화할 것을 우려해 경고사격조차 할 수 없는 작전은 더욱 힘들었다.

연 소령에게 올해는 어느 해보다 의미 깊은 한 해다. 고속정장(대위) 시절 참수리 357호를 이끌고 북한 해군과 목숨 건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둔 지 만 10년이 됐다. 다행히도 그는 총탄이 빗발치는 현장에서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10년 전 그 해상 전투의 현장이 무섭지 않았을까.

연 소령은 “함교에서 보니 갑자기 포성소리와 함께 불빛이 번쩍였습니다. 대응 사격을 시작했죠. 그땐 겁보다는 흥분을 했어요. 아마 아드레날린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순간이었을 겁니다”고 말했다.

참수리 357호는 3년 뒤 제2연평해전에 다시 참전했다가 교전 중 침몰했다. 당시 357호를 이끌며 싸우다 적탄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바로 윤영하(당시 대위) 소령이다. 윤 소령은 그의 후임자였다.

연 소령은 그날을 기억했다. “고등군사반 교육을 받고 대전에서 진해로 내려가던 고속도로에서 ‘윤 대위가 교전 중 숨지고, 357이 침몰했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순간적으로 진공상태에 빠진 것처럼 멍해졌습니다. 당장 차를 돌려 연평바다를 지키는 2함대로 가고 싶었습니다.”

“근무지 1지망은 동해바다였다”
연 소령은 10년 만에 연평바다로 다시 돌아왔다. 10년 전 자신이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이던 바다, 후배 장교가 전사한 그 바다에 다시 돌아오고 싶었을까. 그것도 어느 해보다 긴장감이 커지고 있는 시점에.

이유를 물으니 연 소령은 빙긋이 미소를 띠었다.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인사철 때 본부에서 희망 근무 지역을 쓰라고 하더라고요. 1지망은 동해바다를 지키는 7함대를, 2지망은 연평·대청 해역인 2함대를 지원했습니다. 아마 인사 담당자가 전투경험이 있는 나를 다시 교전 가능성이 큰 2함대로 보낸 모양입니다.”

지금의 바다 사정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사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제3의 연평해전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시점이다. 하지만 10년 전 그랬듯이 지금도 담담한 심정이다. 수시로 후배 고속정장들에게 과거 얘기를 해주면서 교전이 발생하면 용감하게 잘 싸워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말은 “담담하다”고 하는데 속내가 꼭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30대 후반의 많지 않은 나이인데도 귀밑머리에 하얀 새치가 잔뜩 올라와 있다. 원래 집안 내력에 새치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단다. 게다가 “지금 머리도 염색한 겁니다. 염색을 안 하면 반백이 됩니다. 한 4년 전부터 이랬어요”라고 말한다.

인터뷰 도중 수시로 북한 경비정과 중국 어선들의 움직임을 보고하는 전화가 울렸다.

“전장에선 적 움직임만 생각”
‘오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인데 알고 있었나. 전 국민이 온종일 슬픔에 빠졌는데 심정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전장(戰場)에서는 정치적 가치판단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오늘은 정말 적들이 우리를 노릴 수 있겠다’는 겁니다”고 답했다.

사실 해군 2함대는 노 전 대통령 시절에 대한 기억이 그리 곱지 않다.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장병의 유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특히 그렇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과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으로 남북관계가 해빙무드에 들어간 때라, 그 한가운데 벌어졌던 연평해전은 ‘찬밥신세’였다. 한국전쟁 이후 첫 양측 정규군 간의 해전이었던 제1, 2차 연평해전에서 모두 우리 해군이 승리를 거뒀지만 전사자 추모식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행사도 해군본부가 아닌 2함대 차원에서만 할 수 있었다. 지난해가 돼서야 비로소 정부 차원에서 추모식을 주관했다. 당시 전투의 이름도 기존 ‘서해교전’에서 ‘연평해전’으로 바뀌었다.

‘교전’이 비정규군과도 벌일 수 있는 우발적 소규모 전투라면, ‘해전’은 정규군 간 벌이는 진짜 전쟁을 의미한다. 교전수칙도 기존 5단계(경고 방송-시위 기동-차단 기동-경고 사격-조준 격파)에서 3단계(시위 기동-경고 사격-조준 격파)로 강화됐다. 해군은 당시 적이 먼저 공격을 해오기 전에 먼저 공격할 수 없는 기존 교전수칙 때문에 아군 측 피해가 불가피했다고 호소했다. 1차 연평해전에서 ‘9명 부상’, 2차 연평해전에서 ‘6명 전사, 18명 부상’의 피해를 본 것이 그런 이유에서라는 거다.
연 소령은 “교전규칙이 바람직하게 교정됐다고 생각한다”며 조심스레 의견을 밝혔다.

“단속 성토하는 어민들에 섭섭”
북한군과 싸우기에도 벅찬 연평바다의 해군은 3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주임무는 당연히 NLL을 사수하는 것이지만 북한 경비정 외에 중국 어선도 몰아내야 한다. 우리 어민들이 조업권을 벗어나지 않도록 통제해야 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매일 오전 5~6시 꽃게잡이 배가 출어할 때면 어김없이 해군 2함대 고속정 2대가 같이 나가야 한다.

해군에 대한 어민들의 인식도 부담스럽다. 조업권을 벗어나는 어선들과 이를 막아야 하는 해군이 수시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어민 입장에서는 조업권 밖에 더 많이 널려 있는 꽃게를 그냥 두기가 어렵다. 어민들은 “우리 바다를 싹쓸이해 가는 중국 어선은 못 잡고 만날 우리 어민들만 단속해 댄다”며 해군과 해경을 성토한다.

연 소령은 “연평도에 가면 해군한테는 회도 안 판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섭섭했다”며 “적을 코앞에 두고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생활하는 우리 장병의 고충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대연평도=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연평해전 1999년 6월 15일 NLL을 넘어온 북한 해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1차 해전에서 우리 해군은 9명이 부상을 입고, 2척의 정찰선이 파손되는 피해를 보았다. 북한은 30명 사망에 70명이 부상을 입고 2척 침몰, 5척이 파손되는 타격을 입고 물러났다. 2002년 6월 29일 벌어진 2차 해전에서는 우리 측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고 6명 전사, 18명이 부상을 입는 피해를 보았다. 북한은 등산곶 684호가 반파되고 30명이 사상당하며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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