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온가속기 건설에 세금을 써야 하는 이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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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호 35면

어느 과학자가 최근 “큰 예산 들어가는 거대 과학, 과학자 넘어 납세자의 문제”라는 칼럼을 썼다. 가속기와 같은 거대 과학에는 많은 재원이 들어가므로 과학자만이 아니라 국민의 문제라는 내용이었다. 기본 취지에는 십분 동의한다. 과학자들은 전문가로서 필요한 제안을 하지만 거대 프로젝트는 정부와 국민의 동의를 얻어 진행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글에서 문제 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한국도 현재 중이온가속기와 4세대 방사광가속기 건설을 시도하고 있다. 비용은 조 단위로 추산된다. 당신은 우주의 신비를 밝히기 위해 수십조원을 쓰는 데 동의할 수 있는가?” 마치 중이온가속기나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조 단위 내지 수십조원이 필요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중이온가속기는 2008년 내내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사업 종합계획 수립과정에서 각종 토론회·공청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의사결정의 최고기관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전문위원회와 자문위원회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중이온가속기의 건설 예산은 4600억원이다. 수조원 내지 수십조원이 아니다.

금액이 크든 작든 예산을 집행하는 정부는 각종 위원회를 통한 전문가들의 판단과 국회 심의 결과에 따라 일을 한다. 이런 체계는 복잡한 현대사회를 꾸려가기 위해 우리 스스로 구축한 국가 체제다. 가속기 프로젝트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전문 영역은 일반 납세자들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전문가들의 양심과 객관적 근거에 따라 계획되고 국내외 다른 전문가에 의해 검증될 수밖에 없다. 각종 과학 프로젝트들은 납세자의 문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과학자들의 문제로 넘어온다.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이 크게 높아짐에 따라 우리는 방사광가속기와 양성자가속기를 보유 또는 건설하고 있다. 하지만 가속기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여전히 뒤떨어져 있다. 미국·독일·벨기에·이탈리아·일본·캐나다·프랑스 등 선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인도·중국, 브라질 등 남미 국가들도 갖고 있는 수준의 중이온가속기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독일의 헬름홀츠연구회 총재인 율겐 믈리넥 교수는 미래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한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첫째로 기초과학 투자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이온가속기를 예로 들었다. 기초과학 연구를 위해 건설한 중이온가속기로 무통·무혈의 암치료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지멘스에 기술을 이전해 하이델베르크 의대에 중이온가속기 암치료 시설을 건설한 사례를 들었다. 이곳에선 연 1000명 이상의 암환자를 치료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정부는 올해 1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기초과학연구원의 핵심 연구시설이 될 중이온가속기 추진 계획을 밝혔다. 중이온가속기는 스위스 세른(CERN)의 가속기와 달리 특정 학문 분야의 연구용이 아니라 다목적 첨단 연구시설로 설계될 것이다. 지구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희귀 동위원소를 가속해 기초과학 연구와 신물질 개발뿐 아니라 원자력·에너지·바이오·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원천기술을 제공해 산업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을 통해 국내 과학자 7만5000명에게 중이온가속기 이용에 대한 의견을 요청했다. 6월 중순까지 다양한 의견을 받아 기획 단계부터 반영할 것이다. 또 세계적인 전문가들의 자문을 통해 검증받을 것이다. 우리의 제한된 재원을 잘 활용하여 동급 중이온가속기 중에서 세계 최고 성능의 다목적 가속기를 건설하고, 최고 수준의 연구를 펼쳐 국민에게 혜택을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과학자들의 임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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