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Cover Story] 장부 열면 믿음 온다, CR 나서는 기업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1. 지난해 6월 초 L사는 2000억원 규모의 회사채 입찰을 했다. 그런데 엿새 만에 9억 달러가 들어가는 미국 업체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 신용평가사들은 이 회사를 ‘관찰 대상’으로 분류했다. 입찰 때 금리를 더 높게 잡아야 했다는 얘기다. “몇백억원을 장기로 묻어두는 채권 투자자에 대한 정보 제공 수준이 홈쇼핑 채널만도 못하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2. KT는 지난달 15일 회사채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했다.

KTF 합병에 따른 재무상황에 대한 내용이 핵심이었다. AAA급 기업이 이런 설명회를 한 건 이례적이다. 차재연 KT 자금 담당 상무는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면서 합병에 반대하는 채권 금융사가 한 곳도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영어로 CR로 불리는 채권자 상대의 기업 설명회가 주목받고 있다. 기업의 재무구조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CR은 소수 전문가에게 기업의 내용을 깊이 있게 설명하고 토론하는 자리다. 다수의 주식 투자자에게 공개적으로 하는 IR과 비교되는 행사다. 신환종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지금은 기업과 채권자의 신뢰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라며 “채권 금융사나 채권 투자자는 회사 장부를 열어보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CR이 늘어난 것은 금융시장이 불안해진 지난해부터다. 기아자동차, 금호아시아나그룹, STX 등이 이를 통해 유동성 위기설에 대해 해명했다. 또 롯데캐피탈, 두산캐피탈 등은 회사채 발행을 앞두고 CR을 했다.

하지만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이다. 이마저도 자금 시장에 숨통이 트이면서 다시 뜸해졌다. 최근 상위 조선업체 몇 곳에 CR 제안이 들어갔지만, 회사 측은 “굳이 그런 걸 해야 하느냐”는 입장을 보였다.


CR은 사정이 다급해졌을 때가 아니라 평소 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그래야 채권자와 기업 사이에 신뢰가 쌓이고, 결정적일 때 공동으로 살길을 찾게 된다.

매월 9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는 현대캐피탈은 크고 작은 설명회를 수시로 연다. 이주혁 재경본부장은 “좋은 건 좋은 대로, 나쁜 건 나쁜 대로 얘기한다”며 “자금을 주는 쪽에서 싫어하는 것은 안개(불확실성)지 피할 수 있는 암초(문제점)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IR과 달리 소수 전문가만 참석하기 때문에 돈 들이지 않고 컨설팅을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또 2004년부터 CR을 해 온 KT의 차재연 상무는 “국내 채권자들은 주식 투자자뿐 아니라 해외 채권자에 비해서도 소외를 당해 왔다”며 “자금 문제에 대한 정보 제공은 신용평가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CR을 채권 투자자뿐 아니라 현금을 직접 빌려준 금융사로 확산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은행들이 점검을 한다지만 뒷북 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대표는 “뜨내기 주식 투자자를 위한 설명회는 자주 하면서 몇천억원을 장기로 빌려 준 금융사에 대해선 제대로 된 설명회를 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며 “CR을 요구하지 않는 금융사도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CR(Creditor Relations)=채권 투자자, 채권 금융사 등을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 흔히 채권(Credit) IR이라고 한다. 다수의 주식 투자자를 위한 IR(Investor Relations)과 달리 소수 전문가만 참석한다. 재무구조를 알리는 데 초점을 맞춘 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